우리의 우울
나의 공황 및 우울증이 시작된 원인은 직장이었다. '마녀'라 불리는 유명한 분이 '회의' 시간에 자신이 정해놓은 결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비난과 폭언을 쏟아 놓았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었겠는가. 상사의 어처구니없는 갑질을 안 당해본 것도 아니고, 이 분이 좀 과하긴 해도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동안 억눌러왔던 억울함이 터졌다. 왜 인격이 훌륭하신 분들은 승진을 못하고, 승부욕에 불타를 인성 더러운 분들이 승진을 하시는 건지,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회의시간에 소리나 지르고 있는지, 여기 모인 다양한 나이의 인격자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입을 꾹 닫고 한 마디도 못하는 건지.
눈물이 나기 시작하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꺽꺽거리다가 뛰쳐나갔고 울고 불고 혼자 소리 지르다 남편과 통화를 하고 병원을 갔다. 심장박동이 불안정하여 정밀 검사를 받고, 공황증상으로 시작된 것이 이후로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딸의 우울증은 학업 때문이었다. 우수한 모범생인 둘째는 모든 과목을 다 잘했고 어디에서나 선생님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도전했던 몇몇 대회에서 떨어지고, 전국단위 자사고를 준비했으나 떨어지는 실패를 맛보았다.
내신을 기대하며 진학한 동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친구들의 연예, 노는 분위기를 힘들어했고, 몇 번 전학을 가려했으나 내신을 생각하면서 주저앉았던 것이 점점 더 화를 불렀다. 학군지에서 열공하는 친구들을 경험해 보고자 대치동의 유명 학원에서 윈터 스쿨을 다녔는데 시작은 열정과 도전의식으로 가득했으나, 예민함과 우울함으로 점점 더 숙제를 못해가는 횟수가 늘더니 끝은 절망과 실패의식이었다.
질병의 광풍이 증상을 가속화시켰다. 중학시절, 가볍게 비염과 아토피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질병들이 하나둘 추가로 붙기 시작했다. 가방에 예비로 5-6종류의 약을 넣고 다녔고, 수술을 두 번 하고 입원과 진료를 반복했다. 아이는 예민해지고 지치고 괴로워했다.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고 책상에 앉아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절망에 빠졌다. 인간 보기가 싫고 학교도 싫은데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자학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라던 '딸'이, 나중에 나 시집가도 나랑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던 '딸'이 방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고 책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자퇴'를 거론하고 나와의 모든 대화를 거부했다. 의사 선생님께 '부모님의 기대'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라 했다고 한다.
우수한 둘째를 보며 내심 잘 키웠다고 자만했던 나는, 스카이를 논하며 달리던 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베인 듯이 쓰라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 듯 배가 울렁거렸다. 나도 같이 미쳐버릴 것 같았고 지금까지 함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 모든 시간이 나의 잘못된 판단이자 아이에게 부담을 준 것뿐이라는 생각에 나 역시도 자책했다.
병원에서 딸마저도 '우울증'을 진단받고 나오던 날, 나의 죄가 아이에게 유전된 것은 아닌지 우울했고, 삶의 덧없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우울 속에 머물 수는 없었다.
나는 죽어도, 딸은 살려야 했다.
그러니 우울하나 우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니까 강해져야 하고 딸을 살려야 했다.
그래서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태생에 소심이 있었으나 이성과 책임감으로 누르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의지적으로 소심해지고자 했다.
딸 눈치보기, 하고 싶은 말 하지 않기, 얼굴 마주칠 때마다 큰 소리로 웃으면서 유쾌하게 말하기,
최선을 다해 밥상 차려주기, 문 노크하고 문 밖에서 말하기, 잔소리 절대 안 하기,
아이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할 때 무조건 미안하다고 하기
딸 앞에서 미안한 소심하면서도 기다리는 사랑이 넘치는 엄마의 역할을 하다가, 혼자의 시간이 되면 나 또한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간다. 딸 앞에서의 1인 연기가 잠시 막을 내린 시간, 밀려드는 절망감이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익사할 것 같은 두려움에 허우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