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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여강
Dec 25. 2023
물을 걷다. 사해[신혼여행은 처음]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발걸음, 디딜수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죽은 바닷물로 걸어 들어가는 건 가슴께까지만 허락됐다.
몸이 떠올라서 더는 물에 잠기지 않았다.
애써 나아갈수록 사해의 바닥은 나를 밀어냈다.
상체는 물 위에, 하체는 물아래 있다.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겪지 못한 일이어서 무섭더라
.
옆에서 우는 소녀도 무서웠나보다.
소녀는 사해의 부력을 부정하려는 듯이 울었다.
부질없는 울음이었지만,
몸이 떠 있었기에 울 수도 있었다.
곁에는 소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쩜일톤(0.1t)은 족히 나가 보이는,
반백의 남성이 물속을 걸으며 소녀를 달래고 있다.
주변 모두가 떠 있다.
인종,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사해는 너그럽다.
두손 두발을 들었다. 엉덩이로 땅을 댄 게 아니라 물에 떠 있는 상태다. 뒤로 보이는 부표까지가 내가 묵은 리조트에서 허락한 수영 구역이다. 넘어가면? 나도 모른다.
힘들이지 않고 떠오른 몸을 움직이는 건 힘이 들었다.
물에 뜨긴 했는데 자세는 엉거주춤하다.
요령껏 폼을 잡는 데 적응이 필요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뒤로 눕는 것이다.
그러면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가 수면에 위로 떠오른다.
이대로도 충분히 편하지만 목에 튜브를 받치면 잠을 잘 수 있을 듯했다.
허리를 일으켜 세우니 수면이 가슴에 닿을 듯했다.
손발을 앞뒤로 저으면 수직으로 선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야말로 물속을 걷는 것이다.
조금 더 속도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면 된다.
손발을 저으면 평형으로 수영하는 자세가 된다.
이대로 사해 너머로 보이는 서안지구와 이스라엘까지 갈 수 있을 듯하다.
총에 맞더라도, 최소한 물에 가라앉을 일은 없으니 말이다.
떠 있는 이들을 헤아려보면 어른 아이, 남녀, 국적을 불문한다. 분명한 건 모두 구명쪼끼를 입지 않았고, 전부 모르는 사람이다.
사해를 걷자 다시 무서웠다.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상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상은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부터 비롯한다.
사해가 그랬다.
물에 서서 발끝을 내려다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물이 탁해서 시선이 뚫리지 않는다.
여기는 물이 너무 짜서 아무 생명도 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이 얘기를 믿기가 어렵다.
발밑으로 뭔가가 지나다닐 듯하고,
아래서 뭔가가 나를 잡아당길 것 같다.
당시 나의 표정은 대단히 진지하게 했기에,
아마 누군가 나를 봤다면 물속에서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맹세코 실제로는 아니다.
생리현상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사해에서 십여분을 떠 있었을까,
몸 구석구석이 쓰리기 시작했다.
사전에 공부해 간 것인데, 사해는 염분 농도가 높아서 상처가 닿으면 고통스럽다고 한다.
고통은 상처의 범위와 정도가 심할수록 비례해서 깊어진다.
그래서 사해에 가려거든 제모도 하지 말라고 한다.
제모로 피부가 다치는 게 대수롭지 않을 테지만, 물에 닿으면 그 하찮은 틈에서 고통이 생겨난다.
상처와 염분의 결합이 고통을 유발하는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는 게 핵심이다.
외상이 없는 나는 안심했다.
고통은 안심을 터 잡아서 찾아왔다.
슬슬 생식기와 항문 쪽 피부가 아리기 시작했다.
외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대단히 민감한 부위라서 사해의 물에 반응한 모양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렇다고 한다.
방비할 도리가 없다.
가장 취약한 부위는 눈이다.
사해에서 첨벙거리거나 잠수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 의지다.
대신 물이 눈에 들어가 겪을 고통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온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사해가 눈에 닿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경험해봤으면 하는,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남자들이 단명하는 이유와 비슷한,
그런 객기를 부려보고자 했다.
겁이 나서 행동에 옮기지 못하던 차에,
기회가
찾아왔다.
나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사해 주변을 달리다가 만난 가판(왼쪽). 구글로 번역(오른쪽)해보니 커피를 파는 집이었다. 요르단 사람은 상대를 부를 때 여지없이 친구라고 한다.
사해를 대표하는 진흙을 덮어쓴 것이 화근이었다.
온몸에 바른 머드를 씻으려 사해에 들어가서 무심결에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고통은 시차 없이 찾아온다.
안구를 사포로 긁어본 적은 없지만 해본다면 이런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당시 고통으로 나는 앞으로도 이런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눈을 뜨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는 처의 손에 이끌려 샤워기 앞으로 끌려갔다.
고통을 달래는 데에는 상당한 샤워질이 필요했다.
직전에 예수세례지에서 요르단강이 마르는 걸 보면서, 뭐라고 다짐했던가.
물을 아껴 쓰리라는 이 다짐은 샤워질과 함께 씻겨나갔다.
사해의 물질은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다.
눈의 통증은 달랬다손 치더라도, 생식기와 항문에 찾아온 고통이 갈수록 묵직해진 탓이다.
사실 이게 아니었더라도 사해는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말하기 더러운 얘기지만,
사해에 들어간 이들은 정말로 열심히 침을 뱉어댔다.
수영하다 보면 자연히 물이 몸이 닿다가 입가도 젖을 테다.
이걸 마시면 탈이 날까 염려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뱉는 입장은 십분 이해하겠다만,
이걸 보는 입장에서는 되레 몸이 탈이 날 듯 싶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니까.
몸에 바른 사해 진흙을 물에서 씻어내는 광경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사릴만큼 사해를 유해하게 여기면서 몸을 대체 왜 담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참고로 사해는 사유지와 공유지가 혼재돼 있다.
사해 주변으로는 간이 샤워장과 수영 도구를 빌려주고서 돈을 받는 가판이 무수하다.
나는 묵은 리조트에 사유지 해변이 있어서 여길 들어갔지만,
반드시 리조트에 묵어야 사해를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하튼 내가 들어가 사해는 어는 지점에 부표를 띄워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통제했다.
그 통제된 구역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타액과 각질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해를 경험한 일은 특별하지만,
다시 경험하고자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차를 타고 사해를 지나다가 찍은 가판.
문뜩 사해는 바다가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죽은 바다(Dead sea·死海)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짠
민물
호수(염수호)다.
바다라고 해도 믿을만한 것이,
물은 바닷물보다 더 짜고,
크기는 서울시가
쏙 빠질 만큼 크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사해는 바다가 아니다.
강물
은 흘러서 바다에 닿는 게 순리다.
요단강은 순리대로 흐르지 못해 가엽다.
시리아국에서 발원해, 이스라엘국과 요르단국을 좌우로 두고 흐르는 동안
요단강이 받아낸 긴장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이러하고 저러한 이유로 갈등하는 이들 사이를 거치면서 말이다.
그냥 바다(사해)에 닿았겠거니 하고
편안함에 이르렀으면 싶다.
사해 어디선가 차를 세우고 바라본 건너편 모습. 아마도 서안지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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