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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강 Dec 31. 2022

요강의 온기

멀고 먼 변소 가는 길. 요강이 있어서 버텼다. [김제유년]

내가 나고 자란 집은 상하수도가 주거공간에 없어서 변소를 썼다. 변소는 주거공간에서 멀수록 좋다고 했다. 화장실과 달라서 냄새를 차단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해충은 냄새 주변으로 꼬인다. 변소를 가까이 두고 살면 몸은 편하지만, 악취와 모기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변소는 최대한 멀어야 하는 게 조상의 지혜다. 우리 집 변소는 조상의 지혜를 최대한 성실하게 받아들였다. 방에서 마당을 바라보면 맨 왼쪽에, 마루에서부터 십 수 미터 거리에 있었다. 이게 얼마 안 돼 보이지만 매일 이 거리를 오가면 생각이 달라진다. 리 높이의 마루를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제법 운동이 된다.


우리 집 변소는 분과 뇨를 따로 구분했다. 뇨는 무당 구석에 파묻은 큰 오줌독(항아리보다 큼)에 모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와 동생이 여기서 소변을 보는 모습은 온 가족이 지켜봤다. 다행히 분은 실내에서 모았다. 오줌독 옆에 건물을 올리고, 적당한 크기로 직사각형 구멍을 내어, 아래는 빈 공간으로 뒀다. 위에서 일을 보면 밑에 분뇨가 모였다. 여기가 차면 똥차를 불러서 퍼냈다. 그렇지 않으면 낙하한 분의 파편이 위로 튀어 올랐다. 분을 다 퍼내고 안을 본 적이 있는데,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질 않았다. 빠지면 죽을 것 같아 무서웠다. 빈 오줌독도 마찬가지였다. 깊이가 어림잡아 어린 내 키 정도 돼 보였다.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똥개가 낳은 새끼가 오줌독에 빠져 죽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변소는 가는 길부터가 무서웠다.


그래도 우리 집 변소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어느 집은 변을 보다가 변을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발을 디딘 통나무가 돌아가 미끄덩하면, 위에 있는 사람이 밑으로 빠졌다. 사람이 빠지면 안 되는 공간이었다. 동네에서 얼굴이 불그락한 이를 만나면 십중팔구는 여기 빠져서 똥독이 오른 거였다. 5학년 때 담임 박기철 선생님은 ‘그럴 때면 순식간에 양팔을 벌리라’고 알려주셨다. 그러면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진지하게 알려주셔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분은 버리기만 한 게 아니다. 농번기가 오기 전에 논밭에 뿌려 흙이 걸도록 했다. 뇨는 분보다 독해서 흙에 뿌리지 않는다. 나는 이걸 모르고 한 번은 뇨를 떠다가 남새밭에 난 상추에 뿌렸다. 한 여름에 비실거리는 게 불쌍해 물을 준 것이다. 나로서는 큰 결심이었다. 뇨를 뿌린 상추에 밥을 싸 먹는 상상을 하면 내리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그런데 반나절만에 다 죽어버려서 크게 상심했다. 할머니는 나의 진심을 헤아리시고 꾸짖지 않았다.


해가지고 변소 가는 길은 무서웠는데, 거리가 길어서 그런지 무서움도 오래갔다. 문밖을 나서려면 플래시부터 챙겨야 했다. 한 손에 플래시를 들고 일을 보는 일은 여간 고수가 아니면 어려웠다. 나중에는 입에 무는 방법을 익혔으나, 여전히 어둠에서 발을 헛디디면 목숨이 위태하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지 못했다. 여름이라도 될라치면 두 손이 모자란 상황에 처한다. 변소에 들끓는 모기와 싸우려면 살충제와 모기향을 함께 챙겨 떠나야 했다. 변소를 갈 때 동반자가 있으면 좋다. 나는 한밤중 동생을 따라 변소에 가서 말벗이 돼 주고, 살충제로 모기를 쫓았다. 동생은 나만큼은 안 했던 게 선명하게 기억난다. 자주 그랬다.


밤에는 큰일을 치르지 않는 게 그 시절을 살아가는 지혜였다. 당시 습관은 지금도 나의 장 활동을 지배한다. 소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찌 이게 사람 맘대로 되는 일이던가. 어른들은 저녁에 국을 적게 먹고, 물을 조금 마셨다. 여름날 할머니는 ‘자기 전에 수박을 먹지 말라’고 일렀다. 나는 이걸 잘 듣지 않았다. 소변 세포는 한 번이 어렵지 일단 터지면 이후부터는 반복해서 괴롭혔다. 야속했다.


요강은 변소 생활을 하는 집에 요긴한 가재도구다. 무섭고 먼 변소를 집안으로 들여온 것이니, 간이 화장실 같다고나 할까. 특히 노약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우리 집 요강은 놋이었다. 뚜껑을 덮으면 축구공 크기 정도 됐던 거 같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방에 하나, 아버지와 어머니 방에 하나씩 두고 썼다. 요강은 남녀 공용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자는 한방에서 한밤 중에 소변 누는 소리를 공유하는 사이였다. 잠버릇이 고약한 나는 방을 굴러다니다가 요강을 발로 차서 엎곤 했다. 한밤중에 이런 일을 겪는다면 참으로 낭패다. 그래도 할머니는 나를 꾸짖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요강 비우기였다. 눈이 오건 비가 오건 이 일은 나의 몫이었다. 요강을 오줌독까지 들고 가서 버리고, 이걸 마당 세수가에서 씻어오면, 할아버지는 나를 칭찬했다. 요강에는 가족의 체온이 담긴다. 놋을 사이에 두고 전달되는 온도, 그리고 놋을 뺀 안의 무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전날 잠드시기 전에 물을 얼마나 드셨는지 알 수 있다. 이른 아침 요강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멀게만 느껴지던 한 겨울 변소로 가는 길을, 그 온기로써 나는 버텼다. 새해가 요강처럼 따스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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