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못하는 사람에게

알게 된 불편함에 대하여

by 이연


202512.29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어제 오전의 쉼 덕분이다.
쉼이 남긴 선물은
생각보다 가볍고, 상쾌했다.

발소리를 숨기듯
주방 한구석을 정리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돌보지 못해 미안했던 자리다.

정성스레 담가둔
유자차와 생강차가
나를 봐달라고 부른다.
잠시 손을 넣어주니
유리병 속 시간이
금세 환하게 웃는다.

오늘 저녁,
차 한 잔 함께 마셔야지.
방긋이 입꼬리가 답한다.

시간은 그렇게
오늘 아침을 반갑게 맞아주고
내게 힘을 건넨다.

아이들의 성화에
겨우 대체를 구해
무박이라도 좋으니
가까운 곳에서 하루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어제의 목이
그 약속을 흔들었다.
며칠 동안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그려보았던 일정은
그렇게 조용히 무산되었다.

남편의 말은 단정했다.
몸이 불편하면
집에서 쉬는 게 최고라며
선택지는 남기지 않았다.
맞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더는 덧붙이지 못했다.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얼굴과
아쉬움을 삼키는 표정이
겹쳐졌다.

신년 초에라도,
그래도 한 번쯤은…

아이들에게는
모레가 연말의 계획이었다.

우리 집의 나들이는
늘 이렇게 어렵다.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영업자들의 일상이
대체로 그렇다.

요즘은 그래도
주말에 마음만 먹으면
쉬는 가게들이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특성상 365일
매장을 지켜야 하는
의무 아닌 의무가 깔려 있다.

아파도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다.
비운 자리보다
비운 뒤에 남을 일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쉼은
항상 약속이 아니라
미뤄둔 희망처럼 남는다.

아이들은 그걸 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기대가 접히는 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말없이 방문을 닫고 돌아서는
그 뒷모습에서
나도 함께 멈춘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아니면 한 달에 두 번만이라도
편히 쉬는 날을 기대해보며
조심스럽게 건의해본다.

하지만 위로 올려보내도
돌아오는 건 늘 비슷하다.
특성상 쉽지 않다는,
말로 하지 않은 답.

그 말은
설명되지 않아도
이미 익숙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익숙함이
불편해졌다.

무심코 켜둔 뉴스 화면에서
지나가는 말 하나가
그 이유를 건드렸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누군가 정확한 언어로
꺼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몰라서 고개를 돌리는 단계에 있지 않다.
구조가 개인의 노력만으로
넘어설 수 없다는 것도,
“특성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삶을 멈추게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불편하다.
이 불편함은 무지가 아니라
인식에서 온다.

쉬고 싶다고 말하기 어렵고,
자리를 비우는 것보다
남겨질 일을 먼저 떠올리는 삶.
그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듣지 못해서 불편한 시대가 아니라
들었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는 시대다.

불편함은
수준이 낮아서 생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수준이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약자인가.

아니면
약해질 수 없도록
스스로를 오래 묶어두고 살아온
사람인가.

아직 답은 없다.
다만,
불편함을 느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이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감각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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