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딸이 아침에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바로 물소리가 나는 법이 없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딸이 신중하게 선곡한 BTS 노래가 흘러나오고 그 뒤에 물소리가 이어진다. 6학년이 된 딸에게는 생활에 배경음악이 필요한가 보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언제나 노래를 틀어 놓았던, 가슴을 쿵쾅대게 하는 노래들이 오히려 안정감을 주던 시절. 열 다섯, 그 때 나는 윤종신에게 몹시 빠져 있었다. TV에 자주 나오지 않았던 종신오빠는 “기쁜 우리 젊은 날" 이라는 AM 라디오 디제이였다. 나는 소리가 깨끗하지 않은 AM 라디오 주파수를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들어보려고 안테나를 돌려가면서 두 시간씩 집중해서 들었다.
라디오가 끝나면 밤 12시 인데, 잠들기 아쉬워 사연을 적어 보냈다. 날씨가 더운 이야기(94년, 그 해는 정말 기록적으로 더웠다.), 축구 본 이야기(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다.), 교실에서 점심먹은 이야기 등 온갖 시시한 이야기를 엽서에 꾹꾹 눌러썼다. 급기야 내 사연을 읽어줄 때는 우리 오빠가 "사연 자주 보내주시는 분이죠"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종신오빠를 만나러도 다녔다. 바로 한 달에 한 번, 라디오 공개방송. 지금은 없어진 쁘렝땅 백화점 로비에 매주 토요일 저녁 다섯시 쯤에는 매장 몇 개를 물리고 작은 무대가 차려진다. 그 날도 그런 날 중의 하루였다. 그 날의 마지막은 무려 015B여서 아침부터 설렌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나와 반 친구들은 토요일 오전수업을 마치자 마자 마음이 급했다. 종례마치면 뛰어나가려고 엉덩이를 들고 있는데, 선생님은 일찍 마쳤으니 대청소를 하자고 하셨다. 하는 둥 마는 둥 왁스청소를 마치고 학교 앞 내리막부터 지하철역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가방이 사정없이 좌우로 나부꼈다.
방송시작까지는 시간이 많았지만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다 보면 종신오빠를 만나서 인사를 하게 되는 운 좋은 날도 더러 있었다. 그 날도 노란색 양복을 입고 결혼식을 다녀왔다는 종신오빠에게 운좋게 인사도 했다.
어느 덧 백화점 로비에는 하얀 방청객용 플라스틱 의자가 쫙 깔렸다. 앞쪽에 자리를 잡고 곧 방송이 시작되었다. 공개방송에는 네 팀 정도의 가수가 나온다. 첫 게스트는 솔리드였다. 2집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막 1집을 냈던 그 때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신인이었다. 낯선 차림과 화장이 너무 독특해서 잊혀지지 않았던 그들은 이듬해에 이밤의 끝을 휘어잡는 슈퍼스타가 되었다. 나는 솔리드가 TV에 나올 때마다 "나 쟤네 실제로 봤어!"를 한동안 입에 달고 살았다.
다음 순서는 전람회였다. 그 때 막 대학가요제에서 수상을 하고 아직은 무대에서도 부끄럼을 타는 듯한 김동률을 보면서 나중에 남자친구는 저런 사람이 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번째 가수부터는 정말 조바심이 났다. 빨리 끝나야 O15B의 노래를 하나라도 더 들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세번째 가수 아저씨는 나를 놀리듯 정말 속 터지는 노래를 느긋하게 불러댔다. 내가 관심도 없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더니 내 속도 모르고 하모니카까지 불어댔다. 정말 빠르게 뛰는 내 심장과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그 아저씨와 종신오빠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 얘기가 끝나야 노래하나 더 부르고 015B가 나올꺼라고 생각하니 1분 1초가 급했다. 그 아저씨가 들어 갈 때는 나처럼 015B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함성이 이미 무대를 가득 채웠다.
김광석. 나는 요즘 그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 순간을 떠올린다. 지금 이렇게 그의 노래를 들을 줄 알았더라면 그 때 좀 더 귀 기울였을텐데...... 그 때 그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마지막 가수에게 자리를 비켜주며 퇴장하는 그는 쓸쓸한 모습이었을지 되짚어봐도 기억나지 않는다.
올해도 가을에 듣는 그의 노래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