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송한 날들 - 기분 좋았던 날
3월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추적한 봄비를 맞으며 출근해서 얼른 줌을 켰다. 지난달에 이어 오늘도 글쓰기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니, 평일에 누리는 소중한 호사다. 오늘 수업에서는 봄의 방정식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사칙연산 기호가 들어간 책 제목 아래에는 수식이 하나 쓰여있다.
“호수 + 따뜻한 기온 = 하늘의 솜사탕”
아! 우리 선생님 말씀은 틀린 적이 없지만, 오늘은 이과출신으로서 참을 수가 없다. 방정식은 미지수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방정식을 풀 수 있다. 호수가 상수이고, 따뜻한 기온과 하늘의 솜사탕을 각각 변수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런 생각하고 있는 나도 참 병이다. 수학도 잘 못했으면서… 히히.
나도 수식 하나를 써본다. x를 온도변화라 하고, y를 나의 기분이라하면,
y = 나들이 횟수 + (x* 0.000000000000000001)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봄에 나들이를 나가는 것은 설레고 즐겁다. 봄에는 얇은 코트로 멋을 내고 나가도 찬바람을 만나 당황스러운 날이 있다. 그럴 땐 예쁜 카페에 들어가서 따뜻한 라떼 한잔 마시면 뱃속도 기분도 따땃해진다. 춥다고 해서 겨울 잠바를 입고 나왔는데, 등에서 땀이 흐르는 날엔 잠바를 손에 걸치고 아이스 라떼하나 사서 팔을 걷어부치고 걸으면 또 기분이 좋아진다. 날씨야 아무리 변덕을 부려봐라, 나들이 나온 내가 우울해지나.
특히 우리가족 중에는 행사의 여왕이 있어서 나들이 갈 일이 많다. 온 동네 행사를 너무 사랑해서, 동네에서 하는 작은 노래대회까지 꼭 구경가서 모두의 노래가 끝나고 의자를 치울 때까지 앉아있다가 아쉬운 얼굴로 돌아오는 우리 둘째, 지호. 무엇이 그렇게 지호를 사로잡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호 덕분에 우리는 의왕시 행사를 모두 섭렵 중이다. 봄에는 단오 축제, 어울림 축제, 여름에는 의왕 가족축제, 학의천 가요제, 가을에는 의왕 마라톤, 백운호수 축제, 그리고 새해 첫날은 해맞이 행사. 간간히 옆동네 안양시 행사와 동네 도서관의 산행이벤트까지 기웃거리다보면 일년이 후딱 간다. 이렇게 열심히 다니다보니, 행사장에서 만나는 의왕시장에게 괜한 친밀감이 느껴질 정도다.
최근의 의왕시 행사 나들이는 2024년 첫날이었다. 3개월간 미국 출장 중이던 남편이 연말에 열흘 정도 짬이나서 잠깐 한국에 나왔다. 그즈음 지호는 동네구석에 자그마하게 붙은 해돋이 행사를 보고는 잔뜩 신이 나서 집에 와서는 꼭 가야한다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문제는 2023년의 마지막 날이자 해돋이 행사 바로 전 날, 판다씨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에버랜드에 가서 밤늦게 돌아왔다는 것. 길다 못해 끝이 보이지 않는 줄 때문에 판다씨는 못봤지만 눈썰매도 타고 놀이기구도 타고, 호랑이하고 곰도 보고 결국은 늦은 밤이 되어 밤늦게 집에 들어왔다. 다들 해동되듯이 바로 깊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여섯시에 깨긴했는데, 등이 침대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혼자 고민하면서 밍기적거리다가 신나게 코를 고는 남편을 깨웠다.
"남편, 여섯시 반이야. 오늘 해돋이 갈꺼야?”
"갈까? 지금 일어날까?”
늘 이런 식이다. 결단력 없는 두사람이 만나서, 한사람이 질문을 하면 다른 사람이 질문으로 대답한다. 십분쯤 더 기다렸다가,
“아, 진짜 도저히 못가겠다!”
이 한 마디를 끝으로 나는 다시 잠이 들어보려고 했으나, 지호의 원망이 무서워서 당최 잠이 오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으로 누워있다가 시계에서 일곱시 오분을 확인하고, 바로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무거워서 딱 오분만 더 놀기로 하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일곱시 십분. 이제는 물러날 곳이 없다. 나는 영차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남편하고 지호를 동시에 깨웠다.
"해돋이 가자!”
"가게?”
"응!"
남편과 지호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오늘 해돋이 가는 건 다 내 덕인 줄 아셔. 중학생이 되면서 열외를 선언한 첫째에게 다녀온다고 인사를 하고 (물론, 자는 중이라 기억못하겠지만) 길을 나섰다.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새해라고 해맞이를 가는 건 태어나서 올해가 처음이다. 조용한 주차장을 바지런하게 빠져나가서 설레는 마음으로 어슴푸레한 길을 나선다. 조금 달리자 어둑한 길에 멀리서 해가 뜨려고 준비하는게 느껴진다. 상쾌한 아침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갈수록 차가 많아진다. 그리고 조금 더 달리니 심지어 차가 막힌다. 부지런하긴 웬 걸. 도로는 우리 정도 부지런한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아마 미리 주차장을 선점한 우리보다 훨씬 부지런한 사람들 때문인 듯 했다. 차가 막히는 가운데 슬슬 주변이 밝아온다. 눈치없는 새해의 첫해가 곧 뜨려나보다.
남편과 나는 좀 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지호 손을 잡고 뛰었다. 좀 느긋이 달리다가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는 것 같아서 점점 속도를 높였다. 나중에는 거의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 어제 많이 걸어서 허벅지가 욱신거린다. 그래도 힘을 내서 해돋이 장소를 향해 달렸다. 생각보다 멀었는데, 지호는 혹시 해가 뜰까봐 애태우면서 앞서 뛰어가고 있다. 근처에 도착하자 일이천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호수를 에워싸고 모여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의왕시민여러부운.... “ 멀리서 시장님이 마이크 잡은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잘 찾아온 것 같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로 조금씩 자리를 옮겨서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행사장에서는 좀 멀지만, 운치있는 자리에서 노른자 같이 떠오른 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해가 마치 다려준 것 처럼 사람들이 다 모이자 살그머니 떠올랐다.
"남편, 지호야, 올해도 건강하자!”
우리는 한마디씩 덕담을 주고 받고 빨개진 코로 사진도 찍었다.
해가 떠오르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남편과 나도 슬슬 돌아서려는데, 지호가 우리를 잡아 끈다.
“엄마, 떡국 준 댔어. 가보자.”
“지호야, 그거 벌써 끝났지. 저 앞에 사람들도 다 돌아가잖아. 이제 가자~”
하지만 포기할 지호가 아니다. 남편과 나는 지호에게 이끌려서 행사장쪽으로 사람들과 반대로 걸어갔다. 행사장에는 자원봉사자분들이 커피와 차도 나눠주고 있었다. 난 내 한 몸 일으켜서 나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커피를 타고, 차를 준비하고, 예쁘게 쿠키를 구워 온 사람들은 올해 복을 조금 더 받는게 공평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차와 쿠키를 받는 동안 남편과 지호는 소원지를 써서 호수 앞에 설치한 줄에 매달고 왔다. 남편과 지호가 찍어온 소원줄 사진에는 올해도 평범한 행복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소망들이 해를 받아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오는데 저 앞에 긴 줄은 떡국 줄이 틀림 없다. 우리는 줄을 서서 떡국도 먹고 오뎅국도 먹고 입가심으로 귤도 먹었다. 배식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빠른지 생각보다 줄은 금방 줄었다. 우리가족도 자주 가는 백운호수의 큰 고깃집에서 고기와 떡국을 내놓고, 또 동네 농협, 새마을금고, 신협, 상인회 등에서 찬조금을 내고 부녀회, 향후회 등에서 삼일을 꼬박 준비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올해 첫 식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만들어졌다.
집에서 자고 있는 사춘기 큰 딸의 아침 생각에 돌아가는 발길이 급했다. 오는 길에 지호가 내년에 또 오자고 속삭인다. 나의 새해 소원. 너의 열외는 조금 천천히 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