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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사랑

뽀송한 날들 - 시아버지 이야기

by 원호

어렸을 때 나의 세뱃돈 역사는 서러움 그 자체였다. 세뱃돈 뿐 만이 아니다. 친척들이 집에 오는 날에는 두 살 터울의 언니는 맏이라서, 나보다 여섯 살 어린 막내는 귀한 장남이라서 대부분의 경우 나보다 더 많은 용돈을 받았다. 가끔은 아예 맏이나 장남에게만 용돈을 모두 주고 알아서 나눠써라 하고 일임해버리는 속 터지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도 우리엄마는 아들, 딸도 첫째, 둘째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공평하게 세뱃돈은 아예 주시지 않았다. 그래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명절날에는 기분 내고 싶어서 엄마에게 세배 받으시라고 하면서 손을 이마에 곱게 올리고 깔깔거리면서 절받기 싫다는 엄마를 따라다녔다.


요즘은 나의 딸들이 세뱃돈을 받는다. 우리 아버님, 그러니까 딸 들의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돈이 뭔지 몰랐던 어린시절부터 명절이 되면 정성스레 고운 새 돈을 찾아서 아이들에게 용돈으로 주신다. 당연스레 그 돈은 은행 계좌로 들어간다. '엄마가 잘 모아줄께'라는 나의 한 마디와 함께. 그러고 나면 용돈은 계좌 속에 숫자로만 존재하는 돈이 된다. 아이들은 아쉬워하면서 용돈을 나에게 건네지만 어느 순간에는 내 돈이 벌써 이만큼이구나 하고 뿌듯해 하기도 하고 금리가 높으니 이자도 달라는 제법 성숙한 이야기도 한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고 나니 아버님은 이제 명절이 되면 아이들 에게 봉투를 하나씩 건네신다. 봉투에는 천원짜리 다섯 개, 오천원 짜리 한 개, 나머지는 만원짜리로 정성스레 줄을 맞추어 넣어두신다. 그럼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천원, 오천원들은 꺼내고 "엄마, 이 것만 저금할께" 한다. 아이들이 용돈 들고 동네 마트에서 맛있는 과자도 사먹고 문방구에 가서 사고 싶었던 것도 사면서 행복했으면 하는 아버님의 마음이다. 할아버지의 사랑이다.


작년에는 자식과 손자, 손녀 모두에게 로또를 추석선물로 주셨다. 놀랍게도 아무도 단돈 천원도 당첨되지 않았다. 그 여파로 올해는 어머니가 로또 선물을 금지하셨다. 대신 윷놀이 상품을 준비하셨다. 가족들의 사기와 눈속임 가득한 윷놀이 타임 뒤에 맛있는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적당한 상품이 없더라는 어머니의 얘기가 사르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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