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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무렵, 너와의 여름

추억

by 원호

우리집은 시장 한켠의 문방구였다. 다른 가게들 보다 한발은 뒤로 물러서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나도 우리가게 처럼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시장에는 다양한 장사꾼들의 아이들이 언제나 삼삼오오 모여 소란하게 놀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오가며 그 애들의 놀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나에게도 하나둘 친구들이 생겼고. 짖궂지 않은 나와 비슷한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어울려 함께 놀았다. 더운날이면 후덥지근한 냄새가 폴폴 올라오는 하수구의 동그란 구멍을 에워싸고 우리는 돈가스 게임을 했다. 시장에서 주택가로 향하는 골목앞이라서, 어른들이 시끄럽다고 하면 언제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됬으니까... 골목 초입 하수구 앞에는 서로의 발을 쫒으며 '돈까스까스'를 외치는 우리들 소리가 가득했다.


그 때 나와 같이 놀던 M, S,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 S는 우리집 옆 메리야스 가게의 둥글둥글한 딸이었고, M은 골목안 주택가에 사는 새침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 그 애는 얼굴이 하얗고 나와 말도 잘 통하던 했는데, 어느 집 아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애는 그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짖궂게 구는 법이 없었다. 막 4학년을 지나던 우리는 해질무렵이 되면 저녁을 먹고 약속한 듯 모여서 돈가스 같은 놀이를 하다가 숨이 차면 남의 집 대문 앞이나, 담벼락에 걸터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애가 농구공 하나를 들고 온 날은 목적없이 공을 튀기다 까르르 웃었다. 어느 부분이 재밌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위세 등등한 햇빛 아래에서 놀다보면 어느 샌가 가로등 불빛만 남기고 주변이 까맣게 변해갔다. 골목길 가득 수다와 웃음을 채우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바람이 우리의 목과 등을 부드럽게 쓸고갔다.

어느 날인가 그 애와 나만 나와서 놀았던 밤이었다. 골목 담벼락에 가로등을 조명삼아 그림자 놀이를 했다. 그 애는 여전히 손가락을 움직여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며 나에게 말했다.

"넌 여름인데 피서안가? 난 놀러간다."

"어디로?"

"계곡. 너무 재밌을 꺼 같아."

"오래가?"

"아니. 이틀. 물놀이 너무 좋아...... "

그 애는 기대로 달아오른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자기가 얼마나 물놀이를 좋아하는지, 여행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부모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른들은 바빠서 아이들과 잘 놀아주지 못했다. 주말에도 문을 닫는 가게가 별로 없었으니, 이틀을 비워 피서를 가는 그 애가 그렇게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집은 피서를 갈만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놀러가 본 기억이 없어서인지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애가 빨리 돌아와서 다시 같이 놀았으면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애를 잊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오겠거니 하다가 한동안 잊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하교후에 엄마로부터 그 애가 계곡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애가 놀러가기전에 '나 놀러가면 안온다'그러고 다녔었다면서..."

엄마는 듣는 사람도 없는 이야기를 소리 낮춰말했다.


그 애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틀 뒤, 돌아온다고 했었다. 한동안 나는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시장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북적였고, 나만 우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아서 울지 못했다.


그 애의 부모님이 더이상은 이 시장에서 장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게 마지막이었다. 그 애 없이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더위가 식고 바람이 차가워지던 그런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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