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 01
순례길은 산티아고를 목적지로 두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등등 자신의 선택에 따라 그곳으로 가는 여정을 말한다. 순례길에 대한 역사와 유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 채 난 생장이라는 출발지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 순례길은 스페인어로 ‘길’이라는 의미인 까미노라고 통상적으로 불렸다. 까미노의 출발지는 딱 하나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들은 주변 국가들에서 여러 개의 시작점이 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프랑스를 통해 시작이 되는 ‘Camino Francès’, 스페인 북쪽을 걸어가는 ‘Camino del Norte’,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이 되는 ‘Camino Portuguès’ 등등 한 가지 길이 아닌 여러 루트를 통해 사람들은 산티아고로 가게 된다.
나는 그중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서인지 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Camino Francès’인 프랑스 길을 선택했고 까미노의 출발 마을인 프랑스 생장이라는 곳에 오게 되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까미노를 걷기 위한 등록을 마친 뒤 지정해 준 55번 알베르게(숙소)로 갔다. 그곳에서 난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나중에 적어도 한 번쯤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 숙소 관리인은 내게 105번 침대를 배정해 주었다. 방에 들어서 굉장히 어색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대며 자리를 찾아갔다. 옆 침대였던 103번 자리에는 나이가 60은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누워있었다. 흰머리 가득한 짧은 머리와 삶의 깊이를 알 수 있을 만큼의 멋지고 자연스러운 주름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도미토리 숙소에서의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나는 가지고 있던 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채 서둘러 배낭 속에서 이것저것들을 챙겨 씻으러 갔다. 샤워장에 들어가서 입고 있던 옷들을 커튼 뒤에 가지런히 놓아둔 채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수도꼭지를 돌리자 끽끽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세 따뜻한 물이 나왔다. 씻어야 된다는 생각도 잠시 잊은 채,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다 보니 나를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뜨거웠지만 며칠은 굳어져있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자리에 돌아가 보니 아줌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곳엔 아줌마와 나를 포함하여 적어도 열 명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짐을 풀어 어느 정도의 정리를 마친 후에 침대에 앉아, 무언가 큰일을 앞둔 사람처럼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아줌마는 굉장히 깊고 큰 눈으로 나를 힐끗 한번 쳐다보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오늘 하루 어땠어?”
“안녕하세요. 아 오늘 하루는… 그냥 좋았어요.”
“그렇구나. 어디서 왔니?”
“한국이요. 아줌마는 어디에서 오셨어요?”
“난 이탈리아에서 왔어. 한국에서 온 거면 너희 집은 서울인가?”
“네! 맞아요!”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였고 그녀는 이탈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트레비소라는 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의 까미노를 경험했고 한 달 전 프랑스 길을 걷고 나서 다시 출발지인 이곳으로 돌아온 거라고 했다. 난 크리스티나의 까미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자기의 차로 까미노에서 좋았던 마을들과 길들을 다시 한번 찾아가 볼 계획이라 말하며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순호야 여기 왜 오게 된 건지 물어도 될까?”
“음.. 마냥 걷고 싶었어요. 어디가 가장 길게 걸어 볼 수 있는지 찾아보니, 순례길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오게 됐어요.”
“맞아. 까미노는 정말 원 없이 걷기에 좋은 곳이지. 걸으면서 많은 생각들도 할 수도 있고 정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또 역시 그러기에 좋은 곳이야. 인생을 이제 막 시작했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나 이젠 인생의 마지막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사람에게나 그 중간쯤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길이고 아름다운 경험이지.”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크리스티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곳으로 오게 된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일까지 이곳에서 쉴 생각이었고, 크리스티나는 다음날 차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지만 두어 시간 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티나 차가 고장이나 다시 숙소로 돌아왔고, 우린 그렇게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됐다. 나는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 밤 잠들기 전까지 가져온 책이었던 '노인과 바다'를 읽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