펩 01
펩을 길 위에서 처음 만난 순간에는 우리가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나 헤어질 때에 서로를 안고 그렇게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나헤라라는 마을을 향해 길을 걷던 중에 만난 마을 안 작은 성당 앞에 다다랐다. 성당 앞에는 널찍한 벤치와 함께 식용이 가능하다고 표시되어 있는 우물이 함께 있었다. 순간 지친 몸과 머릿속에서 ‘앉아’라고 나에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몇 개의 벤치들 중 새똥이 가장 덜 묻은 벤치를 찾았다. 배낭을 저리 내팽개치고 나서 벤치에 털썩 앉아 세상 편한 자세로 전날 사둔 2유로짜리 값싼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평소 한국에서는 와인이라는 술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와서는 물대신 와인이라는 술과 하루를 함께 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도 서쪽에 위치해 있는 스페인의 지리적 특성상 포도를 키우는 데에 있어 굉장히 유리한 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나름 이곳의 지리적 특성들에 대해 생각을 해 봤을 때 이곳이 가지고 있는 넓은 평야와 강렬한 태양, 적당한 연 강수량과 바람 등의 영향으로 포도며 각종 과일 곡물을 재배하는 데 있어 매우 유리해 보였다. 그중 강렬한 태양의 영향인지 우리나라 과일들과 비교했을 때에 그 당도에 있어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과일의 질도 질이지만, 양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이는 거 같았다. 과일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과일은 오렌지였다. 길을 걸으며 마을을 지날 때 보면 많은 집들 마당에서 흔하게 오렌지 나무와 레몬 나무들을 볼 수 있었는데,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와 레몬에서 나는 달달하고 상큼한 향이 길을 걸을 때마다 기분 좋은 과일 냄새가 나에게 오곤 했다. 어느 정도 지쳐있을 때마다 오렌지와 레몬향 덕분인지 지친 몸과 처진 기분이 금세 괜찮아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걸었던 당시는 겨울이라 할 수 있는 2-3월이었는데 스페인에서는 시기에 상관없이 일 년 내내 오렌지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오렌지가 워낙 많다 보니 길가에도 오렌지들이 굉장히 많은 떨어져 있고 짓눌려있기도 했는데, 길가에 떨어져 있는 오렌지가 오죽 많으면 떨어져 있거나 버려지는 오렌지로 전기를 생산하고, 카페나 마트에서 조금 비싼 생수보다도 생 오렌지 주스가 더 저렴하니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도 내가 얼마나 많은 오렌지를 볼 수 있었는지 조금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와인과 함께 항상 쟁여놓고 다니던 초콜릿과 바게트를 허겁지겁 입으로 쑤셔 넣고 있을 때, 170도 안돼 보이는 작은 키에 컬이 굉장히 심하게 곱슬곱슬한 젊은 남자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수염은 굉장히 덥수룩하게 덥혀있었지만 평소에 꽤나 신경을 쓰는 듯 잘 정리되어 보였다. 키는 작았지만 전체적으로 짙은 느낌의 그의 모습에서 작지만 전혀 연약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안녕. 너 괜찮아?”
“응, 어깨도 아프고 배고 고프고 해서 잠깐 쉬고 있어.”
“아. 다행이네, 근데 혹시 성당 배경으로 사진 한 장만 찍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그는 나와는 달리 낯을 전혀 가리지 않았고 굉장히 밝은 성격의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벤치와 한 몸이 돼버린 상태여서 일어나기 싫었지만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평소에 사진을 찍는 데에 있어서 나름 진심인 편이었기에 그의 포즈와 위치를 잡아주느라 여러 차례 찍어야만 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핸드폰을 건네주자 그는 내가 찍어준 사진을 하나하나 보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이었다.
“너도 한 장 찍어줄까?”
“어? 나? 아…. 그래”
무언가를 찍는 일은 좋아하지만, 찍히는 일에 있어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아 그의 말에 조금 주저했지만, 그의 말과 표정에서 나를 정말로 잘 찍어주고 싶다는 진심이 느껴져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를 찍어줄 때와는 달리 난 굉장히 어색한 포즈와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어준 내 모습이 그렇게나 어색해 보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막상 사진 속에서는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우린 나란히 앉아 쉬고 있었다. 난 그에게 먹고 있던 와인과 초콜릿을 건넸다. 그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눠준 것을 먹으면서 주섬주섬 자신의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내게 에너지바 하나를 건넸다.
“이거 어제 산 에너지반데 너 하나 먹어.”
“오 고마워. 잘 먹을게. 근데 나도 에너지바 있는데 한국에서 사 온 거야. 너 먹을래?”
“한국에서? 오 좋아!”
나는 배낭 속 깊이 숨겨져 있던 에너지바를 찾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너무나 고마워하며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했다. 겨우 에너지바 하나였는데 너무나 고맙다 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과분한 반응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까지 살짝 들기도 했다. 그는 내가 건네준 에너지바에 적힌 한글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며 한국어는 참 둥글둥글하다고 하며 참 이쁘다곤 했다. 나는 그렇게 같이 에너지바에 적힌 것들을 영어로 알려주다 이 에너지바가 만들어진 곳이 바르셀로나라는 것을 찾게 되었고 우린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