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오늘은 까미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이다. 이젠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몸이 완벽히 적응을 했는지, 침낭 속에서 나오는 게 전혀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숙소 문을 나오니 오전 7시였다. 오늘 하루 동안 비 예보도 있었고,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그런지 어두 컴컴한 하늘이 가득했을 때, 난 밖을 나왔다. 나와보니 역시나 전날 확인했던 예보대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난 주섬주섬 우비를 꺼내어 입은 뒤 오늘도 만만치 않은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겐 산티아고가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이 길의 목적지여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800km가 넘는 길의 끝이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얻은 것도 경험할 수 있었던 것들도 많았던 시간이었다. 길을 걷는 시간 동안은 조금은 더 내게 집중해 볼 수 있었던 시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내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 내가 하는 작업의 과정을 기다랗게 늘려 놓은 듯한 과정 속에 직접 들어와 작업과정의 프로세스들을 오롯이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가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서 그 자체로 고마운 마음도 생겼다. 무너져 가고 있던 내게 스스로를 믿고, 지탱해 줄 수 있게 끔 힘을 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까지도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 이 순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마냥 무너져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비틀비틀거리며 버티고 내 삶에 대한 밸런스를 잃지 않고 잡아가려 한 내게 가장 고마웠다. 결국 무너지지 않았다. 아직 내게 혼란스러운 감정은 남아있었지만, 한국을 떠나 이곳에 오기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비틀거리지 않고 있었다. 하루하루 걸으며 더 나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와 보니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다되었다. 아무래도 걷는 내내 비가 와서인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못 걷긴 했지만, 몸이 많이 지쳐있었다. 아무래도 비 오는 날에 길을 걷는다는 건, 맑은 날씨에 걷는 것보다 2-3배는 더 힘이 들었다. 길을 조금 더 걷다 이젠 정말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래도 레스토랑이 있을법한 마을이었기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겨울시즌의 순례길은 비성수기다. 이때에 길을 걸을 때엔 조그만 마을에서는 문을 연 레스토랑이나 펍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도로변 널찍한 바위 위에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니, 길건너편에서 이제야 문을 열고 있는 것 같은 레스토랑하나가 보였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서 보니 이곳은 뽈뽀(문어) 요릿집이었다. 아무래도 산티아고가 바다와 맞닿아있는 스페인 북부의 '갈리시아'지역이라 그런지 어딜 가든 뽈뽀(문어) 요리를 하는 레스토랑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무들로 구성된 오래된 인테리어가 반겨주었다. 나무로 구성되어 있어 더 포근한 느낌을 들게 해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비 오는 날이라, 젖은 나무냄새가 손님을 대신해 은은하게 레스토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정 씨가 레온에서 헤어질 때 주었던 20유로로 난 뽈뽀(문어) 요리 하나와 와인 한잔을 주문하고 나서, 배낭 속 잘 말려져 있는 보송한 옷을 챙겨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나니, 추운 기운도 금세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과 와인 한잔이 나왔다. 난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금세 비웠다. 계산을 하고 레스토랑을 나왔을 때에는 왠지 모르게 다시 하루가 새롭게 시작된 것만 같을 정도로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가벼운 몸을 이끌고 길을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산티아고 근처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항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시내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항 옆 숲길을 따라 한 두 시간 정도 걸어야 산티아고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숲길을 걸을 때엔 주변에 단 한 명의 순례자들도 없었다. 그저 길고 울창한 숲길에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마침 공항 활주로가 옆에 있어 이착륙하는 비행기 소리에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지른다 한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못 추는 춤을 춰도 그것을 보고 웃을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다. 평소에 즐겨 듣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렇게 한참을 춤추며 노래를 부르다 보니, 어찌 됐든 일단 이번 여행의 쉼표 하나를 찍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힘들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대견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저 스스로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이때에 나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감정에 충실하게 눈물을 흘리는 거였다. 한 달가량 힘들게 길을 걸은 것도 생각나고, 지금까지 걸으며 있었던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곳에 오게 된 이유와 목적.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긴 길을 걸으며 그 사람에 대한 추억들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지, 마음속 미움은 사라졌고, 고마운 감정만이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생각이 들자 눈물이 더 흘렀던 거 같다. 슬퍼서, 힘들어서 흘리는 것 과는 다른 여러 것들에 대한 고마움에 흐르는 눈물이었고, 눈물이 나는데도 웃을 수 있었다. 가벼웠고 개운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산티아고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종일 내리던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먹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사라진 먹구름들 사이로 해가 비추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노란 화살표를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니, 멀리서 피리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맞이해 주는 소리였다. 피리를 불며 순례자들을 반겨주는 악사를 지나자마자 웅장한 산티아고 대성당을 만날 수 있었다. 성당은 거대했다. 그동안 여러 마을들을 지나오며 보았던 성당들과는 그 크기며 정교함들이 달랐다. 산티아고 대성당은 대단하다고 느낄 만큼 멋있었고,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대단한 성당 앞에서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성당만큼이나 나도 대단한 일을 해낸 거 같았다.
22년 3월 31일 스페인의 겨울 마지막날 나의 겨울도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