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과 봄비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나와서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가기까지의 거리가 100m가 조금 넘는다.
이 짧은 거리의 도로 양옆에 편의점을 비롯하여 떡집, 어린이집, 의상실, 미용실 등 상가들의 다닥다닥 붙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이 상점들이 골목의 활기를 불어넣고 있고 마을에 생기가 돌게 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요즈음 코로나 때문에 매출이 전에보다 못하지요?"하고 내가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전에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난 2년에 비하면 좋아졌답니다"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좋아졌다는 말에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음료수를 들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봄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길가 곳곳에 키 작은 꽃들이 피어 조금 전 나를 보고 싱긋 웃어 보였던 편의점 주인의 웃음을 따라 웃고 있었다.
그 꽃 옆으로, 위로 하얗고 노란 나비들이 날고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찬 기운이 완전히 빠져 덥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훈풍이었고 몇몇 젊은 청춘들은 반팔 티셔츠 바람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길을 차지하고 있는 상가길 100여 m의 길에는 스무 그루가 조금 못되게 벚꽃나무가 양쪽으로 심어져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온 지 15년이 다 되어 가지만 온전히 그 골목에 벚꽃나무들이 서있고 그 나무에서 해마다 봄이면 만개한 벚꽃들이 피었다가 지는지를 안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은행에 재직을 하고 있을 때 10년을 넘게 그 길로 출퇴근을 하였음에도 지금의 내 기억 속에 그때 만개한 벚꽃들을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듯하다.
출근길 자동차 운전을 하는 내 눈에 분명 피어 있는 벚꽃들이 들어왔을 텐데 눈에 들어온 만개한 벚꽃들을 각색하고 편집하는 내 머리는 출근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 있었나 보다.
그러나 퇴직을 하고 난 지금의 내 눈과 머리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피는 꽃이 보이고 날고 있는 나비들이 보인다.
그제 아침에 기적을 보았다.
작년 이맘때쯤에 벚꽃들의 피었을 텐데 올해는 소식이 없어 매일 벚꽃나무 아래를 지나다니면서 오늘은, 오늘은 하면서 보았지만 벚꽃은 피지를 않았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았을 때도 벚꽃은 없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에 설마설마하면서 차창 위로 본 벚꽃나무에 하얗게 벚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것도 만개의 모습으로.........
어느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는 듯하였다.
어느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하는 듯하였다.
자동차를 길가 옆에 세우고 마술 같은, 거짓말 같은 벚꽃을 카메라에 담았다.
뒤 따르던 자동차 어느 누구도 경적으로 나를 재촉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어떤 자동차는 아예 내 차 뒤에 대고 나와 같은 포즈로 벚꽃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나는 봄에 피는 모든 꽃들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벚꽃이 그렇게나 좋다.
벚꽃이 장미처럼 화려 하지도, 해바라기처럼 colorful 하지도 않지만 벚꽃이 그렇게나 좋다.
순수한 순백의 색깔이 좋고, 벚꽃이 필 때쯤이 봄의 절정이라 그런가 보다.
어제저녁 산책길에 일부러 벚꽃나무 아래로 걸어 집으로 왔다.
그제 내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만개한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하얀 가로등의 빛을 받아 더 하얗고 더 예쁘게 피어 있었다.
나는 또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로 벚꽃을 찍었다.
카메라 앵글에 두어 방울 빗님이 내려앉았다.
내가 서있는 나무 두어 그루 옆 벚꽃나무에 젊은 새댁이 7살쯤 되어 보이는 딸과 함께 하얗게 빛나는 밤 벚꽃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7살쯤 되어 보이는 딸이 새댁에게 말을 하였다.
"엄마, 왜 비는 꼭 벚꽃들이 예쁘게 피었을 때만 내려?"
아뿔싸
그리고 보니 그렇게나 오시지 않던 빗님이 이렇게나 예쁜 벚꽃이 피기를 기다렸구나.
방금 핀 저 벚꽃들을 어떡하나?
벚꽃들이 저절로 다 지고 그때 오시지 싶었다.
잠시의 내 생각이었다.
하얗고 예쁜 벚꽃나무들 옆 매호천에 물이 말라 오리, 황새들이 힘겹게 강가에서 먹이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방금 핀 벚꽃의 안녕을 위해 빗님이 조금 더 있다가 오시기를 바랄 수도, 힘겨워하는 오리와 황새를 위해 지금 당장 빗님이 오시기를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하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빠져 앉을 수 있는 내가 편하다.
해마다 이맘때 만개하는 벚꽃과 해마다 아맘 때 내리는 봄비는 어떤 인연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