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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 저녁을 먹다니...

by 이종열

오후 5시~~

이제 6월 초인데 날씨는 벌써 한여름의 그것이다.

태양은 하늘 한가운데를 조금 비껴 앉아 이글거리고 길가 키 작은 잡초들은 머리를 허리춤까지 빼고 앉아 작렬하는 태양을 마주하고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쩌면 하루를 버티고 있으리라.


퇴직을 하고 내 달라진 하루의 일상 중에 하나가 이 시간에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다.

5년 전 은행에서 근무를 할 때 이 시간은 아직 자신들의 업무를 마치지 못하신 고객들이 객장에 머물러 계실 때도 있는 시간이라 이 시간에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고 습관을 붙이기에 따라 다른가보다.


내가 아직 해도 가시지 않은 이 시간에 저녁을 먹는 이유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내가 워낙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야구와 5시 저녁이 무슨 상관이람 하겠지만 5시쯤에 저녁을 먹어야 산책을 하고 들어오면 야구중계를 볼 수 있는 시간과 맞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젊었었을 때부터 지독한 야구 마니아였다.

아니다.

야구광이었다.



응원팀이 이기면 괜히 그다음 날 일진까지 좋아지는 듯하였고 응원팀이 지면 나의 일진도 같이 나빴다.


야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의 숫자에 밀려 야구 중계 시간에 나는 따로 TV가 있는 방에 격리가 되어 나 혼자 그 방에서 혼자 야구중계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혼자 있는 방에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계를 하는 아나운서와 해설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독방에 같이 있다.


아나운서는 그때그때의 상황을 중계하고 나와 해설가는 둘의 생각을 덧붙여 그 상황들을 해설한다.

이제는 혼자서도 말을 잘한다.

그런 내 모습에 나도 기가 차서 피식 웃기도 한다.


식사가 끝나면 간단히 설거지를 하고 나는 집을 나선다.

옷차림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휴대폰 유튜브를 검색하여 내가 듣고 싶은 것 하나를 골라 이어폰으로 듣는다.

내가 듣고 싶은 그것은 매일매일이 다르다.

내 기분에 따라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본다.


어떤 날은 7080 음악을 듣고 어떤 날은 인문학 강의를 듣고 또 어떤 날은 스님의 법문을 청해 듣기도 한다.


집에서 100여 m를 걸어서 나오면 내가 5년간 거의 매일을 산책하는 산책로가 나온다.

이곳 산책로의 이름이 [매호천]이란다.

딱히 이곳이 매호천이라 팻말이나 이정표를 통하여 알려주지는 않지만 산책로를 따라 쭈욱 늘어서 있는 키 작은 가로등 허리춤에 [매호천 4-2]라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매호천이리라 짐작을 해본다.


사람과 자전거가 같이 다닐 수 있을 만큼의 폭을 가진 인도 옆으로 강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평소에는 실개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여름 어떤 비가 많이 오시는 날은 강이 범람하여 굽이쳐 흐르는데 얼핏 그때 이는 물결이 바다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 실개천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그 강을 터전으로 하여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주 작은 송사리부터 얼핏 눈대중으로 보아도 40cm는 족히 넘는 붕어도 있고 작년 어느 날 밤에는 수달 4마리가 이것을 산책하는 사람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미 오리 한 마리가 족히 7~8마리는 되어 보이는 새끼 오리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는 것도 보았다.

그 오리 가족의 수보다 훨씬 많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그 귀여운 모습을 자신들의 카메라에 담으려 오리가족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워낙 경쟁심이 없는 나는 카메라를 들고 그들과 같이 오리가족을 찍지는 못하였지만 내 눈에 그들의 귀여운 산책 모습을 담았다.


여느 연예인 못지않은 환대를 받는 오리들 바로 옆에는 황새 한 마리가 가만히 서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눈은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내가 보았을 때 그 황새의 눈은 현실의 강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의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하였다.

언제 보아도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얀 깃털을 한 황새는 어느 고관대작의 파티에 초청을 받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멋을 내어 놓고 초대된 파티를 잊어버린 양 멋진 자태를 하고서도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오리는 분주하고 황새는 한가롭다.


오리와 황새가 분주하고 한가롭게 노니는 반대편의 언덕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각자의 자태를 뽐내며 피어있다.

노란색의 금계국, 빨간색의 장미, 보라색의 무슨무슨 꽃들.............


그들은 이름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아도, 누가 보아주지 않는 야생화의 삶이라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소담하게 피어있다.


꽃들의 향연 뒤편으로 색소폰 연주 소리가 라이브로 들려온다.

악보를 펴놓고 서툴지만 열심히, 정성스레 악보를 따라 나 홀로 연주를 하고 있다.


색소폰 연주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다 보면 어느새 산책길의 반환점이 나온다.

따로 여기가 반환점이라 표시는 없지만 나는 늘 여기쯤에서 왔던 길을 돌아서 갔다.


돌아서 본 서편 하늘에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강렬하던 태양이 노을이 되어 산 중턱에 걸터앉아 있다.

태양 주변이 온통 붉다.


이제 멀지 않은 시간에 저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면 또 하루가 갈 것이고 그 하루가 서른 번이 가면 한 달이 가고 그 한 달이 열두 번 가면 일 년이 가겠지.

그럼 내 인생의 나이테에 나는 또 한 겹의 나이테를 더 두르고 나도 이제 곧 노을이 되어 서산 어디론가 사라지겠지.


아~

그런 것이 인생인가 보다.


가까이에 있는 산 중턱 어디선가 초저녁 소쩍새가 울어 댄다.

소쩍~ 소쩍~


오후 5시 이른 저녁을 먹고 나는 천국으로의 여행을 하였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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