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서운 광선은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는 티라노사우루스(육식 공룡)의 가슴에 꽂이고 티라노는 '으윽'이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땅바닥으로 고꾸라져 죽는다.
'컷~'
공룡에게 정의의 칼을 던진 카봇의 연기는 완벽하였는데 그 칼을 맞은 티라노사우루스의 죽음 연기가 불합격이다.
감독에게서 NG사인이 났다.
벌써 세 번째 NG이다.
"아니, 할아버지~
그렇게 죽지 말고 탁 튕겨 나가서 뒤로 넘어져야지
그냥 으윽 하고 죽으면 어떻게 해?"
손자 감독의 연기지도가 매섭고 날카롭다.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죽나?'
넘어졌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혼자 구시렁거렸지만 한번 NG사인을 낸 손자 감독에게 배우 할아버지에 대한 자비심은 하나도 없는 듯 보인다.
"아~
카봇이 레이저 총을 쏘면 탁 튕겨져서 죽어야 해?"
손자한테 죽는 법을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할아버지
카봇에서 나가는 레이저 광선이 얼마나 강한데?"
감독 겸 연기자인 손자가 나한테 연기지도를 해 주고는 이내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다시 감정몰입을 한다.
얼굴이 굳어지고 이내 눈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는 힘이 들어간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양손을 공룡의 앞발로 만들고, 얼굴은 험상궂지만 그래도 카봇에게 살짝 겁을 먹은 육식공룡의 표정을 하고 카봇의 공격을 기다린다.
드디어 카봇의 총구에서 레이저가 나온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번에 또 잊어버리면 나는 레이저총을 다섯 번이나 맞아야 하고 이 더운 날 또 꼬꾸라져 죽어야 한다.
"으윽~"
총을 맞은 가슴을 뒤로 탁 젖히면서 튕기듯 뒷걸음을 치고 이내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레이저 총을 쏜 이 눔은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자세를 풀었다.
총을 맞은 나는 주인공이 자세를 풀고 감독의 OK시인이 날 때까지 그대로 방바닥에 누워 죽어 있어야 한다.
"할아버지
이제 됐어.
정의의 용사 카봇이 악당 티라노사우루스를 물리쳤어"
드디어 감독의 OK사인이 나왔다.
나는 이제 더 총을 맞지 않아도 되고 더 죽지 않아도 된다.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성취감과 행복감이 함께 내 마음 한 곳으로 쓰윽 들어온다.
힘들었던 오늘의 촬영을 모두 마쳤다.
병설유치원 교사인 딸이 그제 여름방학을 맞아 시댁 친척 결혼식도 볼 겸 해서 김포에서 기차로 우리 집으로 왔다.
사위도 오고 올해 네 살이 된 손자도 같이 ~~
지 엄마 말을 빌리면 손주는 우리 집으로 오기 며칠 전부터 대구 할아버지한테 카봇 장난감을 사달라고 해야 한다며 마음이 들떠 있다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고 했다.
나도 이 눔이 내가 사준 장난감을 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나 좋고 행복하다.
오늘 산 카봇을 지 아빠가 조립을 하자마자 연기 역할분담도 지가 하고 죽는 연기지도도 지가 하였다.
자기는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사자 카봇이고 나더라는 지구를 파괴하는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를 하란다.
그리고 정의의 용사가 '정의의 칼을 받아라'하고 레이저 총을 쏘면 티라노는 '으윽'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튕기듯 바닥으로 고꾸라져 죽으라는 연기지도도 함께한다.
내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의 대사가 너무 짧다.
이런 항변(?)은 언감생심 턱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저 감독이 시키는 데로, 하라는 데로 하면 그만이다.
정확히 13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을 때만 하여도 우리 가족은 여섯 식구였다.
어머니
나
아내
두 딸과
아들
그때는 제법 시끌거렸고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어떤 날은 집이 너무 시끄럽고 소란스러워 혼자 나와 고요한 곳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전부 떠나고 아내와 나, 단 둘만이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이 셋은 결혼과 취직이라는 팻말을 들고 전부 내 곁을 떠나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떠났다.
절 같이 조용하던 집에 오랜만에 딸의 가족들이 오니 사람 사는 집 같다.
아이 웃음소리가 나고 아이 울음소리가 나니 이제야 사람이 사는 집 같다.
13년 전의 기분도 새록새록 난다.
웃을 일이 거의 없었던 일상이었는데 손자 때문에 웃고 팔자에 없는 연기 공부도 하니까 좋고 행복하다.
그래 이런 것이 사람 사는 행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