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간식 주기 첩보작전
너무 간절하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 모두가 누누에게 내가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강아지 사료를 주지 않고 사람의 음식을 주면 몸에 좋지를 않고 또 강아지들은 살이 찌면 관절에 무리기가 와서 자칫 큰일이 날수가 생기기 때문이라 하였다.
누누가 자주 가는 주치의 수의사가 그리 말을 하였다고도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나의 생각은 가족들과는 조금 다르다.
사람이야 생각이라는 것도 있고 판단력과 가치관이라는 것이 있어 자신의 마음과 욕망을 제어하고 억제할 수도 있지만 강아지들에게는 그런 제어의 능력과 의지가 없지 않은가?
이 눔 들은 철저히 자신의 본능에만 충실하고 그 본능을 좇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 본능이래야 먹고 자고 것인데 그중의 반을 건강을 이유로 하지 못하게 하면 그놈 행복의 반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관점에서야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추구하겠지만 강아지의 관점에서는 '배고픈 호랑이보다 배부른 강아지'가 낫지 않겠는가 싶다.
어쨌든 누누의 주치의가 알면 펄쩍 뛸 나의 이런 생각과 '제발 한입만'하는 누누의 본능이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의 금실같이 죽이 착착 맞아 자주 첩보작전을 펼치곤 한다.
식구들이 보지 않을 때 사과를 한 조각 떼어 누누에게 던져 준다.
물론 이 사과 한 조각을 위해 누누는 나에게 수없이 많은 애처로 은 눈빛 구애(?)를 펼친 뒤이다.
가족들 몰래 나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누누의 수준도 이제 강호의 고수 반열이 들만하다.
일단 나와 자신 외에 주변에 누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어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어주 빠른 동작으로 내가 던져 놓은 사과를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킨다.
그런데 아뿔싸
나와 누누가 생각을 하지 못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사과의 아싹함이 누누가 씹을 때 그대로 소리가 되어 파장을 일으키고 그 파장이 아들이 있는 방으로 까지 가 버렸다.
아들이 지 방에서 나온다.
아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보인다.
나와 누누는 일순간 얼음이 되어 동작 그만의 군인이 되고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되어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멀뚱 거린다.
아들도 강호의 고수이기는 매일반이다.
나와 누누의 시침을 모를 리가 없다.
"아빠, 누누한테 사과를 주지 말라고 그랬죠?"
아들의 눈빛이 날카롭다.
말을 할 줄 모르는 누누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대신 말을 할 줄 아는 내가 말로 방금 상황을 설명하였다.
"아니, 누누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았는데 왜?"
거짓말은 늘 하던 사람이 잘하는 모양이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조금 전 상황을 거짓으로 부정하는 내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가 떨리고 갈라진다.
고수 아들이 내 말을 곧이 곧데로 듣고 믿을 리가 만무하다.
아들의 현장 감식능력과 추리력은 형사 콜롬보의 그것보다 더 좋아 보인다.
"아빠는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표가 납니다.
거짓말을 하시려면 거짓말 공부를 좀 더 하시던지 아니면 증거를 철저히 인멸시키던지 하세요"
누누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들이 나한테 말을 하였다.
어이쿠~
아들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누누가 방금 먹은 사과에서 튄 물이 20cm 안에 선명하게 즙이 되어 증거자료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누누와 나의 對가족 사기극(?)은 아들의 예리함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누누는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아들에게 체포, 연행되어 방으로 끌려갔다.
누누의 간식을 두고 가족들과 나는 늘 다른 의견을 보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늘 강아지들은 과식을 하면 몸집이 커지고 살이 찌고 그렇게 되면 다리와 관절에 무리가 가서 종국으로는 건강을 해치고 생명을 단축시킨다는 소식(小食) 주의를 주장하곤 한다.
자신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늘 주치의 수의사가 그러더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네 명의 가족들과 맞서는 나는 늘 혼자이다.
이들과 맞짱토론을 하는 나는 소위 쪽수에서 가족들에게 밀리고 목소리에서 이들에게 밀린다.
가족들의 의견을 변호해줄 수의사 같은 전문인도 나에게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나대로 누누 간식에 대한 확신이 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살아가는 이유는 똑같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이루기 위함이고 추구하는 행복은 각자가 다르고 또 다양하다고 생각을 한다.
사람의 경우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면서 그것에서 행복을 찾는 미식가가 있고 좋아하고 동경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여행 메니어들도 있다.
또 평소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옷이나 명품을 사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행복의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누누 같은 강아지들은 무엇으로 행복을 찾을까?
이 눔 들은 거의 먹고 잠을 자는데 자신들의 시간을 다 보낸다.
이들이 잠을 자는데야 다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강아지와 같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죄다 출근, 등교 등의 이유로 자신을 집에다 두고 밖으로 외출을 해버렸기 때문에 뾰족이 할 일이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시간 죽이기를 하기 위해 잠을 자는 것이다.
잠은 그렇다 치고 그다음으로 강아지들의 행복의 원천이 먹는 것인데 그 행복 원천의 반(半)인 먹는 것을 건강상을 이유로 먹지 못하게 말린다면 이 눔들 행복의 반을 사람들이 막아 버리는 것이다.
나는 늘 이것을 이유로 가족들에게 누누의 행복추구권 반환을 주장하곤 한다.
"아들, 내 말 좀 들어봐.
누누가 유일하게 행복해하는 것이 지가 무엇을 먹을 때인데 우리가 이건 몸에 좋지 않으니까 먹으면 안 되고
아직 밥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까 또 안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편협된 잣대가 아닐까?
누군가가 아들 보고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콜라를 몸에 좋지 않으니까 먹지 말라고 하고 눈 건강에 좋지 않으
니까 휴대폰을 못 만지게 하고 게임을 못하게 하면 아들은 어떨까?"
아들은 망설임 없이 조금 전 나의 말에 반박을 한다.
"아빠 말씀도 맞는데 아빠처럼 누누한테 분별없이 오만가지 음식을 다 나누어 주시면 누누는 지 또래 강아지들보다 훨씬 더 빨리 건강을 잃을 것이 뻔하고 고생을 하니까 살아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게 해 줘야지요"
"그럼 아들도 건강하게 살려면 콜라 마시지 말고 게임하지 말고 휴대폰 쓰지 마"
"헐, 아빠 궤변"
결국 나와 가족들의 누누 간신에 대한 분쟁의 초점은 좀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고 혼자인 나 보다 수에서 앞선 가족들 전부는 나에게 절대 누누에게 정해진 시간 외, 정해진 사료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막을 내린다.
내가 누누에게 음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가족들 몰래 음식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몰래 음식을 주다가 오늘처럼 가족 누군가에게 걸리면 음식을 준 나와, 그 장물(?) 음식을 받아먹은 누누는 도매급으로 같이 넘어가 공범으로 들들 볶이고 연행되어 간다.
내가 가족들 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누누의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지한테 조금 서운하게 하여도, 내가 지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내 볼일을 다 보고 들어와도, 명절 같은 때 음식을 만드는데 방해가 된다고 며칠씩 낯선 강아지 호텔에 맡겨 두었다 찾아와도 누누는 한결로 나와 가족들을 반기고 따른다.
사람이면 조금은 삐치고 토라질 텐데 이 눔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늘 한결같이 나를 끔찍이도 찾고 챙기는 이 눔한테 어떤 때에는 다른 가족들한테서 느끼지 못하는 따뜻함을 느낄 때도 많다.
누누는 애완견일까?
반려견일까?
나한테 누군가 물으면 나는 '누누는 반려견'이라 망설임 없이 말할 것이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따위가 있다.
반려동물을 사전에서는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