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상나팔 소리가 내 귀를 감싼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머물렀던 공간들을 살펴본다. 오랫동안 등을 붙였던 내 침대, 수없이 열고 닫았고, 야간 근무 중엔 선임들이 깰까 봐 조심스레 열었던 관물대, 오랫동안 신지 못했던 전투화. 나를 부러워하는 동기와 후임들까지.
"고생 많았다." 호랑이 같던 행보관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행보관님은 원래 작게 말해도 성량이 크셔서 행정반 전체에 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저 한마디는 오직 나와 행보관님만 들을 수 있었다. 가슴이 찡했다.
부대에서의 마지막 샤워를 마치고,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발걸음을 나선다. 허리가 아파 그동안 신지 못했던 군화를 오랜만에 신었다. 이제 과거의 내 무거운 발걸음은 사라졌다.
평생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전역날 아침. 강원도의 하늘은 여전히 한 편의 그림을 담아놓은 듯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여름을 맞이해 무성히 자라난 풀들, 작년 이맘때쯤 한창 풀을 밀고 있던 내 모습이 그려진다.
옮길 짐이 많았지만, 허리가 아파서 전부 옮길 수는 없었다. 고맙게도 동기 녀석들이 위병소까지 짐들을 함께 옮겨주었다. 고마운 감정보다는 미안함이 더 컸다. 근무와 훈련을 오랫동안 열외 했었는데, 욕을 할 법도 했지만 가끔 위로를 해준 녀석들. 마지막에 한 번씩 포옹을 나누고, 아버지 차에 탑승했다.
작년 겨울이 생각난다. 다친 허리를 붙들어 매고, 아픈 내색을 티 내지 않으려고 끙끙 대던 내 모습. 그때 차 안에서는 빨리 집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그 집.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달려가는 차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훈련소 생활부터 자대 배치까지, 예초병을 할지 취사병을 할지 고민했던 그 순간. 풀을 베다 벌에 쏘였던 날들, 첫 신병 휴가 때의 짜릿함, 친한 선임들이 전역할 때의 그 미묘한 감정, 배달음식을 시켜먹을 때의 설렘.... 4급 판정을 받았던 그날, 가만히 누워서 무기력하게 흘려보내던 수많은 날들, 처음 글쓰기와 독서를 알게 된 그날 까지..
그리고 지금. 논산 훈련소 앞에서 아버지와 포옹하면서 흘렸던 그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조수석에서 가만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 앞에선 눈물을 보이기 싫었는데, 아무리 멈추려 해도 눈물이 흘렀다.
내 군생활이 엄청 힘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오래 누워있던 기간이 길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더욱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만약 빨리 집을 가버렸다면,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나는 22년 만에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 마지막까지 버텨 낸 나 자신에게.
내가 미리 집을 가버렸다면, 지금 이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는 고통스러운 재활운동, 도박 중독을 이겨내었다. 철조망 속에서.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독서와 글쓰기라는 마법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나는 두려울 게 없다.
마치며
넘어져도 괜찮지만, 쓰러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수 없이 넘어지다가 결국 쓰러져버렸다. 너무 많이 넘어져 무릎은 까지고 다리에는 아무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나 자신을 저 깊은 곳에 내려놓고, 끊임없는 자기혐오와 자괴감 속에서 살았다. 쓰러진 후에 보는 세상은 나만 빼고 행복해 보였다. 그 속에선 수많은 유혹들이 나를 더 바닥으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쓰러졌음에도 그 후들거리는 무릎을 힘겹게 세우고 한 걸음 디뎌 보면,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쓰러져 본 사람, 그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 본 사람에겐 한 가지 생각뿐이다. "다신 내려가지 않으리."
한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 본 사람이 만들어 내는 발자국엔 반짝임 만이 남아있다.
이 글을 쓰며 버텨낸 나에게, 나를 응원해준 친구, 가족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지금도 철조망 속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용사들에게도
작게나마 위로와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