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오고 그래서 (1)

상추를 위한 땅은 없다





비는 하루 종일 왔다.



치커리는 수경재배로 전환됐고,

열무는 자유낙하 상태.



텃밭의 물살은 약간 빠르고,

감정의 유속은 아주 빨랐다.




배경음악은 비발디 여름 3악장.

내 텃밭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다.



천둥, 번개, 바람, 격앙된 바이올린.

폭우 속 감정의 고저장단까지 완벽하다.



이 정도면 비발디도

텃밭 하다가 만든 거다.





고무장화를 신은 채로

잠긴 텃밭 위를 바라봤다.



가슴께까지 물이 찼고,

고라니의 흔적도 사라졌다.



남은 건 수면 위에 뜬 이파리 몇 조각.



고무장화는 소용없었다.

물은 발끝부터 감정까지 다 들어찼다.

그러니까 텃밭이 아니라 은하강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정신 승리 들어갔다.

“아, 이건 나일강의 범람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래,

그들도 처음엔 멘붕이었을 것이다.

씨 뿌려놨는데 물이 다 덮으면 화가 난다.




하지만 그다음엔

비옥해졌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지금 그 단계다.

나는 은하강 유역 농업 문명이다.




고라니가 남긴 뿌리 찌끄레기,

범람이 만든 진흙 탁본,

그 진흙 위에 선 나는,

은하 문명의 파라오였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고,

물 위에 떠 있는 상추 한 장이 흘러갔다.



고개를 끄덕였다.

“강물은 흘러야 하고, 상추는 흘러가야 한다.”



텃밭이 아니라 명상 공간이었다.

물은 흐르고, 나는 놓았다.



고라니에게도, 비에게도,

그리고 이 모든 짓밟힘에게도.




범람은 신의 축복이라며

진흙 속에 장화를 묻고

기념비처럼 서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물이 들어올 때 슬퍼하지 않았지.

왜냐면..

그들은 알았거든.

지금은 물이고,

나중은 비옥함이다.“




그 순간 은하는

신전에 앉은 파라오가 되었고

텃밭은 나일강 삼각주가 되었다.



“모든 위대한 문명은 진흙에서 시작된다.”

(은하 파라오 제1법칙)



자꾸 이런 말이 나오는 거 보니

지금 각성 중이거나,

망상을 아주 고도화했거나.



구별 못 할 정도면 성공이다.

세상은 원래 그 둘이

같은 옷 입고 돌아다닌다.




상추는 떠내려갔지만,

마음은 남았다.



고라니는 사라졌지만,

믿음은 남았다.



그 믿음은 하나였다.

“나는 반드시, 이 물을 딛고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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