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 04 텃밭 일기: 내가 자란다, 고통 쪽으로

같이 먹을까?



그리고 다음 날.

고라니가 또 왔다 갔다.

이번엔... 치커리

텃밭 가장자리에 남겨둔 치커리였다.

쓴맛이 강해서 사람도 잘 안 먹는다.


한 포기도 아니고, 두 포기도 아니고,

열두 포기를 순식간에 싹둑싹둑.


가위로 자른 듯한 절단면을 보며,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야생의 성악가는 오늘도 풍성하게 소프라노를 지르며 내 자존심을 뜯어먹었다.



고라니는 나보다 이 땅에 익숙한 존재다.



텃밭은 더 이상 나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건 그냥 고라니의 신생맛집.

나는 공급자였고, 그놈은..

구독을 해지하지 않은 충성 고객이었다.



오늘은 시장출동.

계획은 없다.

이유는 있다.

분노는 분산해서 뿌리는 게 맞다.



각종 씨앗과 모종,

포장에 적힌 설명도 읽지 않았다.


‘강한 생명력’ ‘잘 자람’

’햇빛 필요 없음‘

그런 문구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 농사를 짓는 게 아니었다.

나는 복구 중이었다.



열 맞춰 심기? 생략.

농사법? 그런 거 모르고.

지금부터는 뿌린다. 투하한다.



씨앗, 모종, 이름 모르는 것들까지 싹 쓸어 담았다.

나는 텃밭을 아마존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물조리개 대신 호스를 집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라니 진입 방지용 워터캐논.



호스를 샀다.

[아이템 획득: 워터캐논 Lv.1]


공격력은 낮지만, 겁만줄 거라서.

마음은 편하다. 정당방위다.




집에 가는 길,

잠깐 망설이다가

“그래도 이사했는데...”

하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자연스럽게

짜장면 집에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앉았고,

아무렇지 않게

단무지를 두 개 먹고 있었다.



“유기농 선언은, 언제부터였더라?”

면은 잘 비벼졌고 선언은 흐려졌다.



이제 진짜, 정말로,

이 세상 음식과는 작별이다.

... 오늘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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