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기
아이가 온 후로 꼬박 삼백육십오일이 지났다.
아이가 많이 자라주었다. 매일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아이가 크려고 매일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잊을 때가 있다. 너무 빨리 자라버리는 손톱을 고군분투하며 잘라내면서도 아이가 얼마큼 자라고 있는지 무뎌진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머리가 전보다 보슬보슬해짐이 느껴진다. 아이가 장나감을 잡고 일어섰을 때 키가 한마디 더 자란 게 느껴진다. 어느새 손을 뻗으면 테이블 위 중앙에 가까운 물건도 잡을 수 있게 된다. 몸을 살짝만 어딘가에 기대도 안정적으로 일어나 놀 수 있게 되었다. 꿀떡꿀떡 삼키던 음식물도 이제는 잇몸으로도 치아로도 씹어 삼킬 수 있게 되었고 갖다만 대고 있던 빨대도 쭉쭉 잘 빨아 마신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어 무뎌진 감각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되살아 나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달라져 있다. 오늘 아이의 얼굴은 어제의 얼굴과 다르다. 낯설어진 아이의 얼굴을 살며시 만지니 아이는 익숙한 웃음으로 내게 와락 달려든다. 나와 눈을 마주쳐주고, 안아 달라고 손을 뻗고, 읽어달라며 책을 가져온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똑같은 책을 꺼내오는 통에 동화든 동요든 머릿속에 줄줄 외울 정도가 되어 버렸지만, 아이가 기특하다.
삼백육십오일 동안 나는,
여전히 잠이 부족하고 여전히 살은 안 빠진다. 임신출산으로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근육은 더 빠져버렸고 지방은 물렁해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육퇴 후에 땡기는 당과 탄수화물의 유혹을 쉽게 이기지 못한다. 아이의 음식은 유기농을 찾아 헤매면서도 나는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고, 아이가 어떻게든 제때에 푹 잘 수 있도록 아이의 수면에는 진심이면서도 나는 육퇴 후 가는 시간이 아까워 감기는 눈을 버티다 버티다 늦게 잔다. 아이가 살이 빠지면 안절부절못하면서 나는 살을 100그램이라도 빼보겠다고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살이 빠지고 나는 살이 찌니 아이러니다.
아이가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기띠로 안고 식당 같은 델 가면 자연스레 아이는 빼고 어른 명수만 얘기했는데, 이젠 아이까지 정확히 세서 인원수를 이야기한다. 아이는 당당히 한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어딜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지고 자연스러워진 요즘 간혹 아이가 없던 때를 떠올려본다. 그때엔 일부러 자각하여 누리려고 하지 않았던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 지금은 일부러 상황과 시간을 내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 모든 것들은 대부분 혼자 움직이면 되는 '편안함'에서 왔다.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 편안함이 이렇게 소중한 일일 줄이야. 역시나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둘이 하나처럼 움직이게 된 지금, 몸은 늘 피곤하고 마음엔 여유가 없다. 그래서 혼자였던 때를 추억하기도 한다. '아이가 생기면 몸은 힘들어도 아이가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였던 때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삼킨다. 하지만 저 말이 또 맞는 게, 아이와 그렇게 힘들게 여행을 하고 왔어도 또 함께 여행이 가고 싶고, 아이가 먹다 흘려 너져분해진 거실 바닥을 힘들게 훔치면서도 또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힘들게 재운 아이를 깨워 같이 놀고 싶다.
아이란 참 이상한 존재다. 언제나 양가감정을 가지게 하고 그 양가 감정중에 대게는 긍정의 마음이 이긴다. 나를 피로하게 하고 어렵게 하는 힘든 마음들은 힘을 잃고 꼬리를 내려버리곤 한다. 더욱이 이 모든 걸 어떻게 또 반복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또 다른 생명을 기대하게 한다.
365일.
아이와 엄마인 나는 함께 자랐다.
'아이'와 '엄마'가 다른 단어가 아닌 '아이와엄마' 한 단어처럼 붙어 자랐다. 하지만 떨어질 날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힘들고 피로해도 지금이 소중한 이유는 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의 돌이 지난 엄마들을 '돌끝맘'이라고들 한다. 아마도 백일잔치 돌잔치 등 치러야 하는 큰 행사들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 같다. 두 잔치 다 하지 않았지만 나도 '돌끝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축하도 받았다. 나 스스로도 열심히 잘해왔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그런데 아이는 돌이 되면서 엄마 껌딱지, 일명 '엄껌'이 되었다. 낯을 전혀 안 가리던 아이가 정말 신기할 정도로 낯을 가리고 나만 찾아댄다. 궁둥이를 살짝만 들어도 어딜 가려느냐며 울어재낀다. 돌끝맘이 아니라 '돌시작맘'이 되어 버렸다. 접근기, 재접근기, 마의 개월수 등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신호로 위안을 삼아 보지만, 여태까지완 다른 결심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그래도 혼자서만 힘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이도 나와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임을 알기에 다시 힘을 내본다.
아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함께 힘내자!
*스무 편의 글로 시즌1을 마무리합니다. 사실적인 내용들을 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 엄마의 감상적인 일기들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필력임에도 함께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여러 이야기들과 마음을 모아서 시즌2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