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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둘기 Jun 12. 2024

내가 달리기 2등을 하다니

그날 이후 그런 높은 등수는 받아보지 못했다...

20년 전, 초등학교 운동회는 지금과 매우 달랐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한 달 전부터 오직 하루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우선 내가 청군인지, 백군인지 확인한다. 주로 홀수 반은 청군, 짝수 반은 백군이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뒤엔,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응원가를 연습한다. 

“따르릉따르릉 전화 왔어요~ 청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거짓말~ 백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반전과 조롱의 응원가를 통달하면 가장 큰 관문이 남았다. 바로 매스 게임! 우리는 한 조각의 블록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금만 틀려도 호되게 혼났다. 혼나고 또 혼나며, 우리는 점점 완벽한 블록 조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도 참 힘드셨겠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칼 같은 군무를 가르칠 자신이 없다.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온 동네의 축제였다. 운동회 날이면 운동장에는 형형색색 만국기가 달렸다. 부모님은 기본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까지 동네에 사는 모든 가족이 함께했다. 그뿐이랴? 솜사탕 파는 아저씨, 아이스크림 파는 아줌마. 모두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우린 다양한 종목을 겨뤘다. 이기고도 손바닥이 다 까지던 줄다리기, 박을 터뜨리려고 던진 콩주머니에 코피가 터지던 박 터뜨리기. 이겨도 져도 즐거웠던 피구. 그중에서도 체육대회의 꽃은 달리기였다. 한판의 승부를 위해 수많은 준비와 도구가 필요한 다른 종목과 달리, 달리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튼튼한 두 다리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가성비 종목인 달리기를 최대한 이용했다. 개인 달리기도 하고, 계주도 하고, 심지어 학부모 계주도 했다. 무슨 기준으로 뽑힌 건진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도 학부모 대표로 계주를 뛰었다. 엄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코너에서 살짝 미끄러지긴 했지만, 누가 봐도 압도적인 속도였다. 엄마는 그날의 스타가 되었다.


     

나는 엄마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지 못했다. 달리기 3등까지 손목에 찍어주는 도장과 선물로 주던 공책. 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언제나 꼴찌였고, 운이 좋으면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처음엔 졌다는 사실이 분했다. 다른 친구 손목에 찍힌 도장이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저 공책 한 번 받아보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음 운동회에서 나는 꼴찌를 했다. 그 다음 다음 운동회에서도 나는 꼴지를 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꼴찌를 더 경험하고서야, 나는 체념했다. 그때서야 즐기며 달릴 수 있었다. 꼴찌를 해도 슬프지 않았다. 운 좋게 꼴찌에서 두 번째를 하면 엄청나게 기뻤다.     



5학년 1학기 체육대회 날이었다. 그날도 기대 없이 출발선에 섰다. 6명씩 나란히 줄을 섰다. 옆에 선 친구들을 쭉 훑어보았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5학년쯤 되면 서로가 알게 된다. 누가 누가 빠른지, 또 누가 누가 느린지…. 같은 줄에 해 볼 만한 상대가 있었다. 그 친구 얼굴을 보며 결심했다. 

‘내가 오늘 반드시 너는 이긴다.’

그 친구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화약총을 높게 드시며 말씀하셨다. 

“준비!!”

꼴찌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긴장되었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탕!!”     



친구들은 초반부터 빠르게 나를 앞질러 갔다. 상관없었다. 그들은 이미 내 상대가 아니다. 내 상대는 오직 한 명. 그리고 지금, 나는 그를 이기고 있다. 그거면 됐다. 그 순간 앞쪽에서 갑자기 모래바람이 일었다. 1등으로 달리던 친구가 넘어진 것이다. 그 뒤에 따라가던 친구들은 도미노처럼 함께 쓰러졌다. 내 앞의 네 명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나는 빼어나게 느렸기에 그들보다 한참 뒤에 있었다. 덕분에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쓰러져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사뿐히 지나갔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1등!! 내가 1등이다!! 저 멀리 결승 테이프가 보였다.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오늘이 내 생 첫 1등을 하는 날인가? 엄마, 아빠 모두 지금 저를 보고 계시는가요? 제가 1등을 하기 직전이에요!      



코 앞에 있는 결승선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만큼 멀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느렸다. 얼마 못 가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넘어졌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다시 나를 앞질렀다. 결국 그 친구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스탠드로 들어가려는데,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비둘기!! 도장 찍고 공책 받아 가야지!!”

내 손목에는 ‘2등’이라고 적힌 도장이 찍혔다. 1등을 못했다는 아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2등!! 내가 2등이라니!! 이건 정말 가문의 영광이었다. 


      

2등 도장을 간직하고 싶었다. 

평생 손을 씻지 않을까도 고민했다.

그때 그랬어야 했다. 

문신이라도 새겼어야 했다.     

날짜라도 기억하면 기념일로 지정할텐데...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그날 이후 단 한번도 그런 높은 등수는 받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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