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웨이> 1주차 과제 no. 8
아주 어릴 적, 지금은 기억하는 것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어린이 나는 '너는 꿈이 뭐야?'하는 질문에 아무런 현실적인 제약이나 어려움도 고려하지 않고 멋져 보이는 일을 뻥뻥 불러 대도 되었다. 발레 튜튜가 예쁘니까 발레리나, 초콜릿을 좋아하니까 쇼콜라티에, 호텔에서 한 여름 휴가 여행이 재미있었으니까 호텔리어, 이런 식이다.
고등학교에 다다라서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답할 수 없게 되었다. 수시용 생기부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망 진로는 1, 2, 3학년으로 올라감에 따라 넓은 범위에서 좁은 범위로 구체화되어야 하고, 모든 교내 활동을 그에 어떤 방식으로든 수렴하도록 꾸려야 하며, 만일 진로를 크게 바꾸고 싶다면 그럴싸한 계기를 발명해 서류에 반영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만 한다.
대학교에 들어오고선 직업 이야기는 외면하고 싶은 주제가 되었다. 슬슬, 먹고사니즘이 남의 이야기, 어른들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진다. 해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무엇을 어떻게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사방 사람들은 그 모든 걸 어디선가 잘 알아내서 곧잘 따라가는 것만 같다. 무엇보다도, 바깥에서 보기에도 낭만도 로망도 없고 끝도 보이지 않으니 내적 동기는 간데없다.
하지만 옛날 옛적 그 어렸던 날들 그랬던 바와 같이, 아무 제약 없이 다시 재미있는 삶을 골라 불러올 수 있다면 어떨까? <아티스트 웨이>는 실천 첫 주부터 그렇게 해보라고 권한다.
저기 선반에 고를 수 있는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다.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히 늘어져 있어, 가능한 모든 종류를 다 품고 있을 듯하다. 그런데 그 상품은 잼이나 옷 같은 게 아니다. 각각이 한 종류의 인생이다. 이캔에는 수많은 얼굴로 살아가는 단역배우의 삶이 들어 있고, 저건 초등학교 교사의 삶이고, 타국으로 이민을 간 것도, 아예 다른 나라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태어난 경우도 있다. 최고의 성자와 최악의 범죄자, 락 밴드의 슈퍼스타 보컬과 그 매니저, 백수와 일 중독자까지 없는 게 없다. 상상할 수 있는 건 전부 존재한다.
그리고 이제 다섯 가지를 뽑는다. 기준은 '만일 다섯 가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각각 살고 싶은 삶'이다.
나는 이런저런 고심 끝에 무대 연기자, 떠돌이 여행자, 무용수, 우주물리학자, 돈 많고 문화 생활 좋아하는 백수라고 썼다.
그러면 이제 그 다섯 가지 삶 중 하나를 골라서, 그 정수라 부를 만한 활동을 직접 해 보라고 말한다. '아, 하기 무난한 걸로 적을 걸...'이라는 생각이 잠시 떠오르지만, 이미 쓴 건 쓴 거고, 현실성을 기준으로 재고 따진다면 의미가 퇴색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어릴 적엔 춤을 잘 췄던 것 같고, 춤을 추면서 크게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어 내 내면에서 춤은 굉장히 미화, 낭만화되어 있는 상태다. 무용수로 과제를 수행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주위에 연습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쨌든 활동은 활동이니까 예약한다. 옷장 구석에서 예전 수행평가 때문이었는지 사 두었던 까만 발레 슈즈를 발견한다. 춤을 마지막으로 배워본 건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 그만 다니게 된 발레 학원, 중학교 때 세부 장르가 기억나지 않는 스포츠댄스 수행평가가 전부지만 일단 맞춰 춰볼 만한 좋아하는 곡을 몇몇 골라 둔다. 노래 당기는 사람이 길 가다가 코인노래방에 들어갈 때 엄청난 결심을 하진 않는 것처럼, 최대한 마음은 가볍게 싸매고 그냥 가 본다.
전면에 커다란 거울이 있어서 조금 두근거린다. 블루투스 스피커는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으니까 깔끔하게 포기한다. 알고보니 천부적인 안무가였다거나 그런 일은 없다. 인스타 피드에서 본 것 같은 동작들을 머릿속으로는 떠올린다.
이 날 내가 어떻게 춤췄는가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나는 빙글빙글 돌다가 거울 같은 건 못 보게 된지 한참이었다. 혼자 왔으니 참관인도 관객도 목격자도 없고, 녹화용 삼각대가 있긴 했지만 잠시 고민 끝에 왠지 기록한다 하면 뻣뻣해지고 머쓱해질 것 같아서 관두었었다. 지금쯤이면 그 날의 cctv 영상도 이미 기간 만료로 날아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날의 춤은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휘발된 셈이다.
내게 남은 것, 그날의 실재를 증언하는 증거는 그 날 재미있었고, 만족스러움을 충만하게 느끼면서 동시에 더 잘 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 신기하다는 기록, 그 다음 번에 갔을 때는 왜 순수한 즐거움보다 잘 못하고 어설픈 자신이 더 신경쓰이는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의 흔적, 그리고 어째서인지 1주차에는 연 없던 무용 학원에 다니고 있는 자기 자신, 이것들이다.
가상의 인생 살기 : 만일 당신이 다섯 가지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각각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는 조종사, 카우보이, 물리학자, 무당, 수도승이 되고 싶다. 당신은 잠수부나 경찰, 동화작가, 축구선수, 무희, 화가, 행위예술가, 역사 교사, 의사, 과학자, 평화봉사단원, 심리학자, 어부, 장관, 자동차 수리공, 목수, 조각가, 변호사, 컴퓨터 해커, 연극배우, 포크송 가수, 드럼 주자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적어둔다.
이 가상의 인생에서 포인트는 그 삶 자체가 재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적어놓은 것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이번 주에 그것을 해 본다. 예를 들어 포크송 가수를 적었다면 기타를 쳐 보자. 카우보이가 되고 싶다면 시간을 내서 말을 타보는 것은 어떨까? (p. 91)
-브런치북 <<아티스트 웨이>가 하라는 대로>는 2025.1.12 ~ 2025. 4. 21간 수행한 <아티스트 웨이>의 실천 기록을 응집하고 정제한 에세이 형태로 연재됩니다.
-더욱 생생한 날 것의 기록이 궁금하거나, '<아티스트 웨이>가 하라는 대로 하면 정말로 창조적인 예술가가 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엿보고 싶다면 아래 블로그로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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