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광막한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인공행성 벨시안.
칼리뮤는 그 변두리의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물론 ‘태어났다’는 것은 그녀에게 부모가 있었음을 뜻했지만, 그녀의 기억은 고아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분명 칼리뮤가 가져간 게 맞다니까!"
"아냐… 카리무가 그런 거 아니야…"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어눌한 말투로, 칼리뮤는 작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고 떨리는 목소리는 아무도 설득하지 못했다.
"너한테 말한 거 아니거든!"
칼리뮤보다 훨씬 덩치가 큰 남자아이가 날 선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칼리뮤를 본 그는 한층 더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주위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며칠 전부터 내 색연필을 탐내더니, 결국 훔쳐 갔어! 분명히 칼리뮤가 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친구들이 칼리뮤를 둘러싸며 접근했다.
"다시는 그런 짓 못 하게 혼내주자."
한 아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칼리뮤를 세차게 밀쳤다. 작은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어디선가 그림자처럼 뛰어든 아이 하나가 날렵하게 옆구리를 걷어찼다.
"무슨 짓이야, 마케리!?"
"너희들이야말로 무슨 짓이야! 자꾸 이런 식으로 칼리뮤 괴롭히면 원장님한테 다 이를 거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마케리는 주먹을 움켜쥔 채 위협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주먹부터 날리는 성격을 잘 아는 아이들은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 하지만…! 칼리뮤가 내 색연필을 훔쳤다니까!"
중앙에 있던 아이가 더듬거리며 항의했다.
"봤어? 증거 있어? 너 저번에도 장난감 없어졌다고 난리 치더니, 결국 원장님이 놀이터에서 찾아줬잖아! 네가 잃어버려놓고 왜 칼리뮤를 괴롭혀?!"
거센 마케리의 기세에 밀린 아이들은 "흥! 원장님한테 네가 또 친구 때렸다고 이를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물러났다.
그들이 흩어지자 마케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칼리뮤를 부축하며 옷을 털어주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겁쟁이들."
그녀는 씩씩하게 중얼거렸다.
"마케리 나 때문에 또 원장님한테 혼나...?"
칼리뮤가 훌쩍이며 물었다.
"바보. 그게 왜 네 탓이야? 잘못은 쟤네들이 한 거지."
마케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바닥으로 칼리뮤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만 울고, 우리 그냥 놀이터에 가서 그네 타자."
마케리는 칼리뮤와 함께 그네를 타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사실 그녀는 그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칼리뮤가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언제나 뒤에서 밀어주곤 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밤, 두 아이는 몰래 고아원을 빠져나와 언덕 위로 올라갔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둘은 나란히 걸터앉았다. 발밑엔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그 불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을 거꾸로 쏟아부은 듯 찬란하게 빛났다.
"칼리뮤, 너는 이곳을 나가면 뭐 하고 싶어?"
마케리가 물었다.
칼리뮤는 턱을 작은 손가락으로 괴며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 생각 안 했어. 그럼 마케리는?"
마케리는 별빛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될 거야. 내 아이는 절대로 고아원에서 자라게 두지 않을 거야."
"마케리, 엄마 아빠가 있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칼리뮤, 넌 그렇지 않아?"
"음… 카리무도 엄마 아빠 있으면 좋아."
마케리를 위해 적당히 둘러댄 어눌한 대답 속, 그 안에 담긴 칼리뮤의 진심은 마케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칼리뮤는 부모가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가 없는 지금도 딱히 외롭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언제나 마케리가 있었으니까.
어쩌면 칼리뮤에겐 부모가 필요하지 않았다.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길, 마케리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엄마 아빠가 없어도 괜찮아. 칼리뮤가 있으니까."
"나도 마케리가 있어서 정말 좋아!"
칼리뮤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두 아이의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멀리 퍼져갔다.
"오늘 여기에 부부가 왔다는데?"
"그럼 오늘은 누군가 여기서 나가는 거야?"
고아원 마당은 한순간 들뜬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고, 창문에 매달려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 기대는 이내 무너졌다. 젊은 부부가 ‘어린 여자아이’를 원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풀이 죽은 아이들의 시선은 곧 칼리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몇몇은 괜히 그녀를 툭 치고 지나가며 얄궂게 속삭였다.
"너는 좋겠네."
이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라고는 마케리와 칼리뮤뿐. 게다가 칼리뮤가 더 어렸다.
부부는 칼리뮤와 마케리 앞에 섰다.
원장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길게 설명했고, 칼리뮤는 마케리의 뒤에 숨어 우물쭈물하며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반면 마케리는 낯선 부부 앞에서도 침착했다.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계산 문제를 척척 풀어내며 자신감 있게 실력을 보여주었다. 남성은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여성의 시선은 달랐다.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조용히 서 있는 어린 칼리뮤에게 머물러 있었다. 작고 순진한 눈빛, 망설이며 서 있는 모습에서 묘한 연민과 끌림이 엿보였다.
"마케리! 입양이 뭐야? 선생님이 나보고 입양이라 했어."
칼리뮤는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마케리에게 달려가 물었다.
마케리는 흘끗 그녀를 돌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떨구며 낮게 대답했다.
"그건… 칼리뮤에게 엄마랑 아빠가 생긴다는 거야."
"그러면 마케리도 엄마 아빠 생겨? 카리무랑 같이 가?"
칼리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맑은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케리는 말없이 오랫동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 그러긴 어려울 거야. 난 너랑 같이 갈 수 없어, 칼리뮤."
그 목소리엔 깊은 체념과 슬픔이 묻어 있었다.
어린 칼리뮤도 그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케리의 눈빛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며칠 뒤 다시 와서 칼리뮤를 데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칼리뮤는 어떤 기쁨이나 설렘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건 오직 하나였다.
마케리가 자꾸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
"여러분. 우리 네리안은 우주 생명체 중 가장 지적이고 우월한 종족입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감정조절 수업에서 교사가 말했다.
"우리 문명이 이토록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법, 묻어버리고 지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칼리뮤의 시선은 교사에게 고정되지 않았다. 오직 마케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케리는 수업시간 내내 창백한 얼굴로, 책상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그 반복되는 속삭임은 마치 기도문 같았다.
"내일 아침이면 너에게 새로운 집과 가족이 생길 거야."
원장님은 새로운 가정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을 알려주었지만, 칼리뮤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또렷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마케리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복도로 나온 칼리뮤는 필사적으로 마케리를 찾아 헤맸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발견한 그녀의 모습은 낯설 정도로 어두웠다.
마케리는 놀이터의 그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하게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낮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 목소리는 떨리고, 흐트러져 있었다.
칼리뮤는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했지만, 결국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마케리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칼리뮤는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날 밤, 마케리는 깊이 잠든 칼리뮤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칼리뮤는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고, 자신을 깨운 사람이 마케리라는 것을 확인하자 환하게 웃었다.
"마케리!"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그 웃음을 받아줄 기색이 없었다. 어둡게 드리운 표정 속에서 마케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뮤… 잠깐만, 나 좀 따라올래?"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명 슬픔이 묻어 있었지만, 어린 칼리뮤에겐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케리가 다시 자기와 말을 섞어준다는 사실만으로, 칼리뮤는 마음이 들떴다.
"응!"
짧게 대답한 칼리뮤는 곧장 마케리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그녀의 손에 꼭 달라붙자, 마케리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떨렸다. 두 아이는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
마케리가 칼리뮤를 데려간 곳은 고아원 뒤편의 버려진 폐건물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은 곰팡이 냄새와 축축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틈새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 한층 더 불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마케리가 입을 열었다.
"칼리뮤… 이제는 너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해."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웠다.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번져 있었고, 그 눈빛을 본 칼리뮤 역시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나… 마케리랑 같이 있고 싶어… 가고 싶지 않아…"
칼리뮤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텅 빈 건물 안에 조용히 울렸다.
하지만 마케리는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말했다.
"안 돼, 칼리뮤. 저번에도 말했잖아. 그들은… 한 명만 데려갈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등졌다. 그리고 순간,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칼리뮤의 손목을 움켜잡아 안쪽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작은 몸은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져 차가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칼리뮤는 충격으로 눈을 크게 뜨며 마케리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그녀는 울면서도 단호했다.
"미안해! 미안해, 칼리뮤!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마!"
마케리는 울부짖듯 말하고는 재빨리 철문을 닫아버렸다. 두꺼운 금속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 세상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겼다.
그녀가 울면서 뛰어가는 소리가 철문 너머로 점점 멀어져 갔다.
처음엔 너무 놀라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칼리뮤의 작은 손가락은 흙바닥 위에서 가만히 떨리고만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두 손으로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마케리! 마케리! 왜 그래! 나 무서워! 열어줘!"
금속 문은 묵묵부답이었고, 새어드는 빛 한 줄기조차 없었다. 완벽한 어둠이 칼리뮤를 삼켰다. 숨조차 막히는 듯한 공포가 가슴을 옥죄어 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지만, 두꺼운 철문 너머엔 정적만이 흘렀다. 멀리 떨어진 고아원 건물에서는, 그 어린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칼리뮤는 끝없이 마케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단 한 번의 대답도 없는, 잔혹한 침묵뿐이었다.
그때 칼리뮤를 지배한 감정은 충격과 공포였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뒤 그녀를 끝내 옥죄게 될 것은, 그보다 훨씬 깊고 쓰라린 감정이었다.
칼리뮤가 그곳에서 꺼내진 것은, 날이 훤히 밝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밤새도록 울어 눈물이 말라버린 탓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목소리를 잃은 듯,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장은 어찌 된 일이냐며 거듭 캐물었지만, 칼리뮤는 대답 대신 멍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건물 안에 갇혀 있던 동안, 마케리가 칼리뮤를 대신해 입양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사실 그들에게 칼리뮤냐 마케리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어린 여자 아이였고, 똑 부러지는 아이였던 마케리도 그들의 마음에 들기엔 충분했다.
마케리가 떠나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칼리뮤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다 쏟아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그래, 가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슬픈 거지. 그건 ‘슬픔’이라는 감정이란다. 하지만 칼리뮤, 그런 감정을 지워내야만 비로소 완전한 네리안이 될 수 있어."
원장은 위로인 듯 위로 같지 않은 말을 건네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칼리뮤는 부모가 생기지 못해 슬픈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던 것은 단 하나, 마케리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마케리가 그녀를 철문 안에 밀어 넣었을 때 그녀가 느꼈던 감정은 단지 공포였다.
하지만 지금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감정은 그것과는 달랐다. 훨씬 더 깊고 오래가는, 차갑게 스며드는 무언가였다.
공포는 순간의 감정이지만, 이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칼리뮤는 생각했다.
만약 마케리가 “가지 말라”라고 했다면, 자신은 끝까지 그들과 함께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마케리가 “가고 싶다”라고 말했다면, 자신은 기꺼이 그 자리를 내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케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칼리뮤를 가두고 떠났다. 칼리뮤의 마음에서 떠나가기로 선택한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절단 내었고, 그 사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뮤는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케리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다는 사실조차 끝내 숨겼다.
커다란 배신감과 깊은 상처 속에서도, 그녀는 마케리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게 진심이었기에, 그 바람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날 이후 칼리뮤는 감정이 가져오는 고통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