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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1

# 35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Observer


앗다바란 항성계의 거대한 가스행성 고궤도 상공, 그 위로 궤도상륙모함 아수라가 묵직한 선체를 끌며 항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양옆을 호위하는 순양함과 구축함들은 매끄러운 푸른빛을 내며 무겁고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창밖에는 부서진 우주정거장의 잔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산산이 조각난 모듈과 끊겨진 광 패널, 녹슨 철골 구조물이 마치 죽은 고래의 뼈처럼 흩어져 있었다. 폐허가 된 거대한 우주정거장은 가스행성의 중력에 천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지혜와 기술이 빚어낸 찬란한 문명의 상징이었겠지만, 지금은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차가운 유해에 불과했다.

칼리뮤는 조용히 창가에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곳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웃고, 울고, 서로에게 기대며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이들이… 지금은 모두 잿더미와 함께 흩어져 버렸다. 그녀는 잠시 그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곧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모습과 닮아버리리라.

칼리뮤는 시선을 차갑게 돌려 손에 들린 태블릿으로 향했다. 화면 중앙에는 굵은 붉은 글씨로 「비밀」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었다. 신임 장교인 그녀가 열람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고, 많은 부분은 검열선으로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속한 팀의 임무 계획만큼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작전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P-3 행성, 궤도 방공 무기 무력화. 그리고 해병들의 강하 지점을 확보하는 것. 칼리뮤의 임무는 적의 모행성을 향한 공습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것이었다.

칼리뮤는 숨을 고르며 화면을 껐다. 방금 본 잔해와 폐허가 언젠가 자신이 밟게 될 행성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 시야에서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막스는 하루도 빠짐없이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빛을 살피고, 손목이나 어깨에 작은 부상은 없는지 확인하며, 쉬는 시간엔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거칠게 갈라진 손등과 흉터로 얼룩진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묵묵히 경청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상적인 네리안의 무심하고 냉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칼리뮤는 그런 막스를 통해 팀원들이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용 휴게실. 낡은 조명이 낮게 깜박이는 가운데, 금속 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막스가 컵을 내려놓으며 불쑥 물었다.
"칼리뮤 소위, 너는 왜 군에 입대하게 된 거지?"

칼리뮤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곧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꼭 대답해야 합니까?"

"나는 팀장으로서 팀원들의 사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막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은 예리하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칼리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저하는 듯 보이다가, 결국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추천을 받았습니다."

막스는 픽, 코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도 추천만으로 이곳에 오진 않아. 특히 이런 전시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할 거면 차라리 돈 때문이라고 하지 그랬나?"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웃어넘기며, 사실을 말하라는 듯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칼리뮤는 마침내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궜다.
"... 사회에서는 아무도 저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차갑다… 그런 말을 들었죠.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고… 결국 도망쳤습니다. 이곳으로요."

막스는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다가 묻는다.
"그 선택, 후회하지는 않아?"

칼리뮤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컵 표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곳은 감정을 지워내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직이라 생각합니다. 육체의 고통이… 감정 자체를 지워내주니까요."

막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감정을 지워내? 꼭 그래야 하나? 자넨 감정 조절 능력이 탁월하다던데?"

"그건… 지표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여전히… 노력 중입니다."
칼리뮤는 시선을 피하며 낮게 말했다.

막스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겉으로 보이는 넌…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칼리뮤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래서… 팀장님도 제가 불편하십니까?"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다른 팀원들은 저와 가까워지려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차갑게 보이기 때문이겠죠."

막스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그게 네 마음에 걸리나?"

그 말에 칼리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오래 봉인해 두었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케리의 얼굴. 그날의 배신, 차갑게 닫히던 철문.

칼리뮤는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저는… 항상 효율적인 네리안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감정이 가져오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감정은 여전히 저를 아프게 하고, 이성은 그 감정에 무너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저는 결국 비효율적인 네리안일 뿐입니다."

말을 끝내자, 칼리뮤 자신도 놀랐다. 처음으로 이렇게까지 속내를 드러냈다.
억눌러왔던 말이 터져 나오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차갑게 얼어붙은 금속 바닥 위로 그녀의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막스는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는 칼리뮤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고독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장에서 보아온 수많은 피와 땀,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보았던 눈물들.
지금의 칼리뮤는 그저, 또 한 명의 지독히 외로운 젊은 네리안이었다.

"효율적인 네리안… 솔직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막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감정이니 뭐니 하는 것도 내겐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네가 예전에 했던 말처럼…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지."

칼리뮤는 여전히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겠죠. 군인은 감정을 버리고, 오직 임무만을 바라봐야 하니까요."

"아니."
막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군인이란 임무를 위해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살아남고… 살아가는 일이야. 서로가 살아남게 하기 위해 싸우는 거다. 그러기 위해 팀이 있고, 팀원이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거야."

칼리뮤는 눈가를 적신 채 고개를 들어 막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단단했고, 동시에 따뜻했다.

"명심해라, 칼리뮤. 군인은 임무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결코 팀원을 버려두지 않아. 그 팀원이 어떤 사람이든 말이야. 그리고 그 숭고한 행위는 모두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지? 그 답을 찾고 싶다면, 먼저 살아남아라. 끝까지 살아가라. 그러면 언젠가, 스스로 깨닫게 될 거다."

그 순간, 칼리뮤의 가슴속에서 미묘하게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아직은 단단해지지 못했던 그녀의 마음이 막스를 향해 기대게 되는 순간이었다.




"적의 코어리움 정제소가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해병 2강습연대가 진입해 안전을 확보하면, 대량살상무기 해체반이 이곳에서 반물질 폭탄을 회수하게 될 거다…"

작전 지휘관의 브리핑이 좁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칼리뮤의 귀에는 그 말들이 뭉개진 잡음처럼 흘러갔다.
그녀의 두 손은 플라즈마 소총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고,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흔들리고 있었다. 심장이 가슴을 두드리며 미친 듯 뛰었고, 숨결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보이지 않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손가락 끝은 땀으로 젖어 미끄러웠다.

두려움.
그 감정이 자신을 조여 오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완전한 네리안이라면,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거친 흉터가 새겨진 손바닥 위에는 작은 껌 하나가 얹혀 있었다.
고개를 들자, 막스의 얼굴이 보였다. 눈빛은 여느 때처럼 강렬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도움이 될 거다. 씹어."
짧고 단단한 목소리.

칼리뮤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 감사합니다."

껌을 집어 들어 입에 넣는 순간, 그녀의 숨결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씹는 리듬이 심장의 고동을 서서히 따라잡고 있었다.

막스는 낮게 덧붙였다.
"애써 숨기려 하지 마.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마음이지."

그는 잠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다만 맞서 싸워. 그 감정을 갖고 있되 그것에 지지만 않으면 돼."

칼리뮤는 껌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 퍼지는 인공적인 단맛이 긴장으로 말라버린 혀끝을 적셔주었다.
그것이 껌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의 든든한 존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조금 전까지 그녀를 잠식하던 두려움의 그림자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수라의 암갈색 격납고에서, 푸른빛의 유선형 선체를 가진 소형 수송선 몇 대가 서서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모함의 그림자를 벗어나자마자 함체의 외피가 희미하게 빛나며 사라졌다.

스텔스 기능이 가동된 것이다. 수송선은 마치 허공으로 스며들 듯 모습을 감춘 채, 차가운 우주공간을 벗어나 은밀하게 행성 표면으로 낙하했다.
아래로 다가오는 풍경은 낯설고도 장엄했다.

울창한 숲, 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한 나무들. 기묘하게 푸른빛을 머금은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얽혀 있었고, 안개 같은 수증기가 숲 속을 감싸고 있었다. 수송선은 마치 그림자처럼 나무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더니, 짧은 진동과 함께 땅 위에 착지했다.

퍽―! 쉬익―!

감압실의 해치가 열리자, 어둠 속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분출되듯 뛰쳐나왔다.

그들은 말없이 지정된 위치로 흩어져, 숲 속을 향해 총구를 겨누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숲은 낯설 만큼 고요했지만, 대원들의 호흡과 장비의 전자음이 묘한 긴장감을 더했다.

막스는 가장 먼저 주변 지형을 훑은 뒤, 홀로그램 지도를 펼쳤다. 파란빛이 그의 얼굴을 스치자, 거칠게 그어진 전술 경로가 드러났다. 그는 짧게 손짓을 하며 팀을 이끌었고, 대원들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숲 속으로 사라졌다.
발걸음마다 낯선 풀잎들이 스쳐 지나갔고, 그때마다 습기가 묻어나며 군화 밑창을 적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사이로 눈부신 백색광이 스며들었다.
적의 방공 진지.
막스가 헬멧을 두드리며 짧은 신호를 보냈다. 즉시 대원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소총 끝에 파장 억제기(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각종 파장들을 억제시켜 은밀 작전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를 부착했다.

찰칵, 칙-

장치가 고정되는 소리가 이어졌고, 병사들의 스코프에 푸른 HUD가 켜졌다. 어둠 속에서도 매섭게 빛나는 렌즈들이 일제히 표적을 찾는 듯 반짝였다.

막스는 전술 파우치에서 작은 망원경을 꺼내 들고 적의 진지를 훑어보았다.

'초소 2개. 각 초병 2명. 외곽 순찰 2명. 식별 적 6명. 거리 400. 일제효력사격 준비.'

막스의 수신호가 짧고 간결하게 움직였다.
대원들은 이미 스코프를 들여다보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긴 정적이 숲을 감쌌다.

막스가 마지막으로 망원경을 들여다보곤, 적외선 신호기를 짧게 작동시켰다.

총성은 없었다. 대신 시야에 있던 6명의 적이 거의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외곽 경계가 단숨에 무너졌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았고, 적의 경보가 울리기 전에 진입하여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막스는 자리에서 번개처럼 일어나 앞으로 달려 나갔다. 대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뒤를 뒤따랐다.
칼리뮤도 침을 삼키며 숨을 고르고, 곧 그들의 발걸음을 좇았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그 소리는 숲의 고요와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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