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질소 절단기의 날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철망을 태워냈다. 울타리의 쇠줄이 녹아내리자, 곧장 열 명의 부대원들이 그림자처럼 몸을 낮추고 틈새로 파고들었다.
적의 주둔지는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유리처럼 위태로웠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며 움직였다.
이곳엔 고궤도 방공포대가 두 문 설치돼 있었다. 그것을 무력화하지 못한다면, 아수라와 함대는 이 행성에 결코 다가설 수 없었다.
부대는 수신호와 함께 양갈래로 흩어졌다. 칼리뮤는 막스의 뒤를 바짝 따르며 어둠 속을 가르듯 전진했다.
순찰병 몇 명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가, 곧장 '칙—' 하고 터지는 파장 억제기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플라즈마 소총의 무심한 섬광조차 드러나지 않았다. 베테랑 팀원들의 사격은 치밀하고 즉각적이었으며, 총성 없는 죽음만이 잔혹하게 이어졌다.
칼리뮤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지만, 정작 표적을 겨눌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숙련된 팀원들이 그녀가 적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차례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야에 쓰러져 있는 시체 하나가 들어왔다.
칼리뮤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네리안보다 큰 키, 좁쌀무늬의 거친 피부, 튀어나온 송곳니가 그와 그녀가 다른 종임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네리안의 피와 다르지 않게 붉게 번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칼리뮤의 위장이 뒤틀렸다. 속이 울컥하며 치밀어 올랐다.
"정신 차려요, 칼리뮤 소위."
팀원 하나가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칼리뮤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억지로 눈앞의 광경을 떨쳐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도착한 대공포 진지.
포 주변을 지키던 적들은 단 몇 초 만에 제압됐다. 짧게 울리는 작은 총성과 함께 번쩍이는 섬광이 스쳐 지나가자, 적의 대공포 진지는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팀원들은 훈련된 동작으로 폭발물을 설치하며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칼리뮤의 시선은 또다시 주변의 시체에 붙잡혔다.
죽음은 이토록 가까이 있었고, 그녀는 그 광경을 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아직 살아 있는 병사 하나가 바닥에 몸을 비틀며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칼리뮤를 노려보았다. 그의 떨리는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더니, 반짝이는 권총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뮤는 반사적으로 소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방아쇠 위에 올린 손가락은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의 생명이 죽음에 맞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그녀의 손끝을 마비시켰다.
순간, 번쩍하고 적의 가슴에서 불빛이 터졌다.
권총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고, 병사의 눈빛은 서서히 빛을 잃었다.
칼리뮤가 뒤돌아본 곳에는 막스가 서 있었다. 담담한 표정, 그러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네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단호하게 울렸다.
"곧 저 모습이 네 모습이 될 수도 있고, 네 동료들의 모습이 될 수도 있어. 항상 기억해라, 칼리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덧붙였다.
"우린 죽이기 위해 쏘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그리고 살리기 위해 쏘는 거야."
칼리뮤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던 손으로 소총을 다시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무겁게 그녀의 손을 짓눌렀다.
폭약의 설치를 무사히 마친 후 다시 집결지로 모인 팀원들을 이끌고 막스는 관측지점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주둔지 내의 모든 경계등이 점등되더니 귀를 찢는 듯한 경보음이 울렸다. 적들이 동료의 시체를 발견한 것임이 분명했다.
막스는 주저 없이 원격 폭파장치의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화염과 파편이 높게 치솟았고,
콰앙—!
뒤이어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적 병력이 쏟아져 나온다! 철수 지점으로 이동, 후방 추격 주의!"
막스의 목소리가 짧고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대원들은 주저 없이 철조망의 통로로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칼리뮤가 통과하자, 멀리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전투 함성들이 밀려왔다.
탕, 탕—!
화약을 사용하는 원시적인 총성이 귓가를 스치며 공기를 찢었다. 탄환이 가까스로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며 흙바닥에 박혔다. 원시적이었지만, 생명을 앗아가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즉각 후방 엄호사격이 이어졌다. 팀원들이 적의 형체를 향해 플라즈마 섬광을 퍼부었고, 칼리뮤 역시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쏘아야 한다'는 막스의 말이 그녀의 모든 신경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울타리를 통과하던 동료의 몸을 방패처럼 가리며 연이어 사격을 이어갔다. 총구는 흔들렸지만, 플라즈마 빔은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래도 쏘아야만 했다.
"이제 됐어! 달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과 함께, 그녀는 다시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총탄은 여전히 매섭게 날아들었다. 탄환이 귓가를 스치며 ‘핑—!’ 하고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포는 그녀의 다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추격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플라즈마에 꿰뚫린 병사들이 채 쓰러지기도 전에 새로운 적들이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적의 포위망이 서서히 조여들고 있었다.
막스는 상황을 단번에 판단했다.
수송기까지 적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여기는 브라보 팀! 현재 대대급 적 병력과 교전 중! 전송한 좌표로 고궤도 폭격 요청!"
그가 급하게 무전기를 꺼내 들고 다급하게 외쳤다.
잡음 섞인 응답이 곧 돌아왔다.
"에코 팀이 대공포 무력화에 실패했다. 구축함 헤레스는 사정권에 진입 불가. 반복한다. 구축함 헤레스 진입 불가."
막스는 이를 악물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목소리를 더 크게 높였다.
"대함용 어뢰를 행성에 발사해 주기 바란다! 지상에서 레이저로 유도하겠다!"
"위험 사격 요청임. 확인 바람. 확실한가?"
"양호! 발사하라!"
짧은 정적 후, 교신이 이어졌다.
"대함용 어뢰 발사. ETA 2 마이크. 데인저 클로스, 데인저 클로스. 행운을 빈다. 이상."
막스는 곧바로 팀원들을 향해 고함쳤다.
"2분간 현 위치에서 원거리 방어사격! 곧 폭격이 떨어질 거야!"
그는 곧 레이저 표적 지시기를 꺼내 들었다. 숲 너머, 총구 화염이 번쩍이는 지점을 향해 붉은빛이 뻗어 나갔다.
탄환이 빗발쳤다.
‘칙칙’ 소리를 내며 방열되는 소총, 교체되는 배터리의 ‘찰칵’ 소리, 비명과 숨소리, 그리고 땅에 쓰러지는 육체들의 무게. 전장의 소리들이 혼돈처럼 뒤엉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뚫고—
우우우웅—!
대기권을 가르며 돌파하는 거대한 어뢰의 음향이 하늘을 진동시켰다. 그 압도적인 굉음은 숲 위를 덮치며 온 세상을 흔드는 듯했다.
"모두 엎드려!"
막스의 외침과 동시에 대원들이 땅에 몸을 웅크렸다.
다음 순간, 세상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였다.
거대한 섬광이 시야를 집어삼켰고, 이어진 폭발음은 귀를 찢을 듯한 굉음으로 밀려왔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충격파가 숲과 땅을 흔들어대며, 세상의 소리를 집어삼켰다.
“... 모든... 대공... 무력화 성공... 구축함... 포격 실시...”
잡음 섞인 무전기 소리가 폐허가 된 숲 속에서 낮게 흘러나왔다.
그제야 정신을 붙잡고 눈을 뜬 칼리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한때 울창하던 숲은 잿빛 먼지와 불타버린 토양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몸을 숨겼던 거대한 나무는 산산조각 나 쓰러져 있었고, 울창했던 숲은 어느새 고층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 듯한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만약 네리안 강화 전투복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몸도 이 숲처럼 갈가리 찢겨 나갔을 것이다.
충격파에 날아가버렸는지 소총과 각종장비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잿더미 사이를 두리번거리던 칼리뮤의 눈에, 멀리서 무거운 나무 기둥에 깔린 채 몸부림치는 동료의 모습이 들어왔다.
칼리뮤는 곧장 달려가 나무를 들어 올렸다. 손끝이 부러질 듯한 압력이 전해졌지만, 결국 동료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저곳에서 부상자들이 절뚝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도 여전히 뛰어다니며 팀원들을 확인하는 막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그 순간, 어두웠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궤도 위 구축함에서 내려오는 광선 포격이 행성의 공기를 가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붉은 빔이 대지를 관통할 때마다 땅은 갈라지고, 불길은 솟구쳤다. 마치 분노한 신이 내려보내는 징벌 같았다.
“개새끼들... 빨리도 쏘는군. 우린 덕분에 죽을 뻔했는데 말이야...”
칼리뮤의 어깨를 부축받으며 일어난 한 병사가 이를 갈 듯 중얼거렸다.
막스는 무너진 나무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붉은 섬광으로 번쩍이는 눈부신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아직 끝난 게 아냐. 마침... 이곳이 개활지로 변했으니, 여기다 비콘을 설치한다.”
팀원들은 응급처치를 마친 뒤 흩어져 장비를 수거했고, 비콘을 조립했다. 이내 전자음과 함께 푸른 불빛이 깜박였다.
비콘이 작동한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슈우우—!
기다란 빛의 꼬리를 남기며 수십 개의 강습 캡슐이 불덩이처럼 대기권을 뚫고 내려왔다. 불타는 꼬리불빛이 유성우처럼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빠른 속도로 낙하하던 캡슐들은 지상에 닿기 직전, 강력한 역추진 화염을 분출하며 충격을 흡수했다. 순간, 자욱한 먼지 구름이 폭발하듯 일어났고, 폐허가 된 숲은 다시 짙은 흑연으로 뒤덮였다.
펑, 펑—!
땅에 내려앉은 캡슐들이 터져 열리자, 그 안에서 무장한 해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쏟아져 나왔다. 일부 캡슐에서는 호버링을 하고 있는 장갑차와 전차가 기계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로는 적의 대기권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하늘을 휘젓고 있었지만, 쏟아져 내리는 캡슐들을 모두 격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막스는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아, 깊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이 전쟁... 이제 곧 끝이 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