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칼리뮤가 마케리와의 사건 이후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냉철했고, 언제나 이성적이었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네리안 사회에서 칼리뮤는 이상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완전한 네리안’에 가깝게 보일수록 사람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이성을 추구하는 차가운 사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의 사람들은 단 한순간도 감정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았다. 칼리뮤는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도 이러한 사회의 모순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자신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완전한 네리안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자신을 멀리할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뮤 본인은 감정이 필요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녀가 택한 생존 방식은 고립이었다.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준 것은 언제나 관계였고, 상처는 타인과의 연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타인을 멀리하고 자신을 감정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선 이성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칼리뮤는 때때로 자신이 여전히 감정의 흔적에 휘둘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 그녀를 조여 오는 감정은 다름 아닌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더욱 일과 학업에 매달렸고, 자신을 더욱 지독하게 채찍질했다.
그래야만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감정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고, 그래야만 버림받은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제가 왜 선발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가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칼리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앉아있는 사무실은 조용하게 정돈된 공간이었다. 벽에는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고, 홀로그램 화면만이 파란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책상 너머엔 중년의 네리안 남성이 홀로그램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앗다바란 항성계에서 전쟁이 벌어진 건 알고 계시죠? 지금은 신원이 확실하고, 검증된 우수 인원만이 선발됩니다. 스파이와 사기꾼들이 넘쳐나는 시대니까요."
"그 말은 곧, 제가 스파이라는 뜻입니까?"
칼리뮤의 눈빛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히 말했지만, 어렴풋한 불편함이 드러나 있었다.
사무원은 화면에서 눈을 떼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희미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당신은 우수한 인재라 보기 어렵다는 거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언제나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감정 조절 지표 또한 평균치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대체 어떤 결격 사유가 있다는 겁니까?"
사무원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짓을 했다. 그러자 홀로그램 화면이 칼리뮤 앞까지 이동해 왔다. 차가운 푸른빛의 숫자와 그래프가 줄지어 떴다.
"보이시죠? 당신의 성적과 성과 지표는 탁월합니다. 그러나 여기..."
사무원은 손가락으로 한 항목을 가리켰다.
"대인관계 지표와 공감능력 수준은 거의 바닥이에요. 이래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칼리뮤는 화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인관계 지표가 낮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 조절 능력이 뛰어난 겁니다.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니 제 효율성은 오히려 보장되죠. 이 지표 자체가 오류입니다. 당신도 알잖아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결국 감정노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요."
사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주장이군요. 맞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지원자를 상대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 말이 와닿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은 말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은… 결국 우리 사이에서도 낯선 존재이니까요. 정말... 웃긴 현실이죠?"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다른 자리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안정적이고, 늘 사람이 필요한 자리죠. 당신이라면 아마 잘 해낼 겁니다."
그는 다시 손짓을 하자, 새로운 홀로그램 화면이 칼리뮤 눈앞에 나타났다. 그곳엔 칼리뮤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던 하나의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관학교’
칼리뮤는 미간을 좁히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사무원은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시죠, AI 씨. 다음 사람들이 불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요."
어디에도 섞이지 못했던 칼리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관학교의 생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도 언제나 최상위 성적을 기록했으나 단 한 번도 동료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늘 혼자였고, 혼자인 것이 오히려 편안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혹독한 훈련. 새벽부터 이어지는 구보, 땀으로 젖은 전투복, 근육을 찢어내는 듯한 고강도 체력훈련, 시뮬레이션 전투와 사격 훈련들은 오히려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육체의 고통은 마음속의 공허와 고독을 잠시나마 지워주었고, 훈련장에서 흘린 수많은 땀방울은 감정을 잊게 만들어주는 대가였다.
칼리뮤는 고통을 무기로 삼아 자신을 단련했다. 그녀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해졌고, 마음은 점점 더 굳건히 닫혀갔다.
그렇게 모든 과정을 뛰어난 성적으로 마친 그녀는 결국 사관학교를 조기 졸업했다. 우수한 자원들을 빠르게 전선으로 보내려는, 전시상황이 가져온 특별한 조치였다.
곧 그녀는 앗다바란 공습군 사령부 직할 특수임무대에 배속되었다. 소수의 베테랑 군인들로만 구성된 정예 부대, 수색정찰과 사보타주, 요인 암살등을 수행하는 최정예 부대였다. 갓 임관한 신임 장교가 그곳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전례가 없었다.
회색빛 철문이 무겁게 닫힌 지휘관실 안, 공기에는 오래된 금속 냄새와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는 긴장된 자세로 서 있었다. 책상 너머, 두툼한 팔뚝과 거친 흉터가 돋보이는 젊은 장교가 그녀의 인사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실전 경험은?"
낮고 거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칼리뮤가 배치된 팀의 지휘관인 막스 소령이 시선을 서류에서 떼지 않은 채 묻고 있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칼리뮤 소위."
날카롭게 끊어지는 목소리. 칼리뮤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가슴속에서 미세하게 요동치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시선을 고정했다.
막스는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눈빛은 마치 상대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진짜 속마음을 꿰뚫으려는 듯했다.
"우리 팀은 이 부대 안에서도 최고야."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철을 긁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그만큼 가장 위험한 임무를, 가장 앞에서 수행하지. 이 사실은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칼리뮤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주먹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막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솔직히 말하지. 너 같은 여자애가 이곳에서 오래 버티긴 힘들 거다.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이라도 전출 신청을 해라. 아직 늦지 않았다."
그의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말은 방 안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칼리뮤는 순간 움찔하며 손끝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곧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따위라…?"
막스가 입꼬리를 비틀며 미소를 지었다.
"삶에 미련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
칼리뮤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군인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배웠습니다. 제겐 임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막스는 그녀를 노려보며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군인으로선 훌륭한 자세이긴 하군.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겠어.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그 속에는 그녀를 향한 미묘한 호기심이 번뜩였다.
칼리뮤와 그녀가 속한 부대가 벨시안의 임시 주둔지를 떠난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장기간의 작전을 위해 거대한 궤도상륙모함 '아수라'에 몸을 실었고, 알 수 없는 임무를 향해 앗다바란 항성계로 떠났다.
아수라의 내부는 이미 피곤에 찌든 병사들의 숨소리와 낮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금속 벽에 반사되는 발걸음 소리 사이로, 지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겨우 며칠 정비하고 또 전장이라니… 빌어먹을."
"보충병도 턱없이 부족해. 저 신참들이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까…"
"이 전쟁, 끝은 나기는 할까? 젠장…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거지?"
투덜거림은 피로와 체념이 뒤섞인 울림이었다.
누군가는 헬멧을 벗은 채 손가락으로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을 만지작거렸고, 누군가는 멍하니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철제 복도의 매캐한 냄새가 섞여있는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칼리뮤는 그 사이를 막스와 함께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차갑게,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다들 불만이 많아 보입니다…"
칼리뮤가 낮게 중얼거렸다.
막스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저들 중 대부분은 전쟁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거라곤 생각 못 했으니까."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의 목소리 속엔 미묘한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칼리뮤는 그 뉘앙스를 곧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이 군인의 본분 아닙니까. 저들은 지금… 감정적입니다."
칼리뮤가 주변의 흐릿한 눈빛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막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그녀의 단단히 닫힌 내면을 꿰뚫어 보려는 듯 묵직했다.
"저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
막스가 낮게 말했다.
"너도 그 모든 게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물론입니다. 감정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감정이 가져다주는 비효율과 고통을 직접 겪어봤습니다."
칼리뮤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막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불현듯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장을 경험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하게 울려 퍼졌다.
"책상 앞에 앉아 명령이나 내리는 자들은 감정을 배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하지만 전선에선 달라. 죽음에 대한 공포, 동료를 잃은 분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 바로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 저들을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야."
복도의 끝을 향해 걸어가던 막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그러니 저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전장을 겪은 자들이 감정에 잠식되는 건… 슬프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의 말은 단호했지만, 동시에 묘하게 따뜻한 울림이 있었다.
칼리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막스의 발언에 놀라 가만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사관학교에서 수없이 들어온 가르침은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잊고 싶은 기억이 가져다주는 감정의 고통을 이미 몸으로 겪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순간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막스의 말은, 여전히 감정을 숨겨내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감정을 갖고 있어도 괜찮다는 은근한 위로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우주 속, 거대한 궤도상륙모함 아수라는 묵묵히 항로를 따라 항해를 이어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별빛은 차갑게 반짝였고, 그 빛은 곧 피와 눈물이 흩뿌려질 전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