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훈련소의 훈련병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외부와의 전화통화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육 우수자에겐 1분간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라는 교관의 말이 들릴 때면, 훈련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너도나도 혼신을 다해 훈련에 임했다.
그러나 이런 ‘전화 찬스’를 얻는 훈련병은 극히 드물었다. 사격 표적을 한 발도 놓치지 않거나, 수류탄을 목표 지점 안에 정확히 넣는 정도가 아니면 훈련소에서 누군가에게 전화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편지는 달랐다. 훈련소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입소 첫 주를 제외하면 2주차 부터는 거의 매일 편지를 받는 훈련병들도 있었다.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은 다양했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자친구가 있는 훈련병들은 정말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군대에 남자친구를 보낸 여자들은, 정말이지 대단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 역시, 여자친구의 편지를 받는 훈련병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받은 첫 편지는 A4용지에 프린트된 인터넷 편지였다.
내 기억으로는, 육군훈련소 다음 카페에 편지 내용을 작성해 올리면, 그 편지를 출력해 해당 훈련병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온 어느 날, 조교들이 차례로 교번을 부르며 편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59번 훈련병!”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내 손에는 몇 장의 종이가 쥐어졌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들도 있었지만, 그중 단연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사람은 나의 여자친구였다.
작은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활자들. 그 안에는 나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다정한 표현들이 가득했다. 고된 훈련 속에서 언제나 단맛이 그리웠던 나에게, 그 편지는 달콤한 휴식이 되어주었다.
그날 나는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훈련병에게 지급된 병영일기의 뒷장을 찢어 빼곡히 글을 적었다. 나는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 ‘생각보다 괜찮다’는 이야기, 그리고 ‘너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하지만 편지를 다 쓰고 나서야, 편지를 담을 봉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때는 조교에게 봉투를 부탁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니, 아마 그럴 만도 했다. 1주차 훈련병에게 조교는 감히 말을 걸 수조차 없는, 너무나 어려운 존재였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편지봉투를 구하는 대신,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훈련병들에게 지급되는 보급품은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다.
훈련병의 모든 것은 ‘필요 최소한’으로만 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먹는 것, 씻는 것, 자는 것, 그리고 훈련받는 것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씻기 위한 보급품은 치약과 칫솔, 그리고 비누가 전부였고, 피부 관리 같은 것은 사회에서나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샤워를 위해 지급된 비누 하나, 그리고 허락된 시간은 고작 1분 남짓. 온몸에 미리 비누칠을 해둔 뒤, 들어가자마자 물로 헹구고 바로 나오는 것이 훈련병의 샤워였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보급품 중엔 의외의 물건도 하나 있었다. 바로 ‘반짇고리’, 정식 명칭으로는 ‘보수대’라 불리는 물건이다. 그 안에는 실과 바늘, 몇 개의 시침핀과 옷핀, 여분의 단추, 그리고 쪽가위가 들어 있었다.
이걸 처음 받았을 때는 ‘군인에게 이런 게 왜 필요하지?’라고 생각하며, 솔직히 고개가 갸웃거렸다. (물론 나중에서야 보수대는 손상된 피복류를 스스로 수선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훈련병이 적어도 한 번은 이 ‘보수대’를 사용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전투복에 자신의 이름과 교번이 적힌 명찰을 달 때였다.
요즘에야 훈련병 명찰이 인쇄되어 나오거나 자수로 처리되어 나와 간단히 부착하면 그만이지만, 내가 훈련소에 입소하던 시절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노란 천조각에 직접 이름과 교번을 적고, 그것을 바느질로 가슴에 달아야 했다.
한 번도 바느질을 해본 적 없는 수많은 남자들이 쪼그려 앉아 전투복 위에 명찰을 꿰매던 그 풍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보수대’를 꺼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그 ‘보수대’를 새로운 용도로 쓰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실과 바늘을 ‘풀’ 대신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어렵사리 구한 A4용지 한 장을 편지봉투 모양으로 접었다. 칼이나 가위가 있을 리 없었으니, 필요 없는 부분은 손톱으로 꾹꾹 눌러 자국을 낸 뒤 손으로 뜯어내야 했다.
그리고 봉투 모양으로 접은 종이에 하얀색 실을 꿴 바늘을 가져다 댔다. 실의 장력 때문에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바느질해야 할 부분은 몇 겹으로 접어 내구성을 보강했다.
하지만 얇고 약해 보이기만 했던 종이들이 겹쳐지자, 오히려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엄지손가락이 붉어지도록 힘을 주어 억지로 바늘을 밀어 넣었고, 휘어진 바늘을 다시 펴서 또 꿰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심지어는 어릴 적 ‘기술·가정’ 시간에 배웠던 바느질 기억을 더듬어, 가뜩이나 오래 걸리는 ‘박음질’로 종이를 꿰매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종이와 바늘을 들고 끙끙거리는, 내 그 괴상한 편지봉투 제작 작전은 동기들에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모두의 관심 속에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박음질 편지봉투를 완성해 냈다.
그리고 삐뚤빼뚤한 재봉선이 그대로 드러난 그 하얀 봉투가 무사히 여자친구의 손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의 주소를 정성스레 적어 넣었다.
며칠 후, 그녀에게서 또 다른 편지가 도착했다. 이번엔 인터넷 편지가 아닌, 커다란 봉투에 어여쁜 손글씨로 적힌 편지였다.
그 두툼한 봉투 안에는 정성스러운 편지지 세트와 우표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내 편지가 무사히 그녀에게 닿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차오르는 안도감과 기쁨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리고 내 박음질 편지의 도착은, 나뿐 아니라 그녀에게도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보낸 편지를 본 순간, 수만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고. 편지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실과 종이로 꿰맨 그 봉투의 모습만으로도 내가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자연스레 떠올랐다고 했다.
그 서툰 박음질 자국을 보고 웃음이 났지만, 동시에 눈물이 차올랐다는 것이 그녀의 고백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아내는 그때 받았던 그 편지가 내가 써온 모든 편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한다.
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내내 우리는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가장 간절히 그리워했던 그때만큼은 그 어떤 시기에도 다시없었던 것 같다.
요즘 군대에서는 편지를 쓰는 장면을 예전만큼 보기 어렵다. 핸드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이제 그것이 사회와 군을 연결해 주는 가장 큰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지에는 편지만이 담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편지는 느리고 답답한 소통의 방식이지만, 그 시절의 군대에서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였다.
군에서 편지가 소중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아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연결의 감각 속에서, 우리는 내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등병의 편지.
그 편지에는 아마도 군대라는 닫힌 사회 밖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그 속에서의 새로운 경험들,
그 모든 낯섦 속에서 마음을 기댈 곳을 찾는 군인은 편지지 위에 꾹꾹 눌러쓴 글자들로 자신의 그리움을 표현한다.
그 글자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하나의 다리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