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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식

# 23

by 더블윤

논산 육군훈련소.

그곳에서 5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훈련병들에게는 ‘수료식’이라는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모든 훈련병이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날은 이등병 계급장을 수여받으며 정식 병사로 인정받는 날이자,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가족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 역시 그날을 기다려왔다. 작은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얼굴, 그립고 또 그리운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훈련 기간 내내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도시락을 싸 올 거라며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라고 묻는 그녀에게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단어를 편지에 적어 보냈었다.




수료식 당일,
유난히 청명한 하늘 아래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았던 깨끗한 A급 전투복을 꺼내 입고, 검은 전투화가 빛이 나도록 몇 번이고 솔질을 반복했다.
쓰고 있는 베레모는 괜히 자꾸 매만지게 되었고, 아무렇게나 접어도 티가 나지 않을 팔소매를 몇 번이고 다시 접어댔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치장을 하느라 아침 일찍부터 관물대에 붙은 작은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수백 명의 훈련병들이 열을 지어 드넓은 연병장으로 들어섰다.
그 많은 인원의 오와 열을 맞추느라 자리를 잡는 데만도 한 시간은 걸린 듯했다. 예행연습을 반복하며 뜨거운 태양 아래에 오랜 시간 서 있어야 했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내뱉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의 불편함보다, 곧 다가올 순간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앞 사열대 위에는 단상이 세워졌고, 그 뒤의 가족 대기석에는 하나둘씩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워갔다. 그들은 예행연습 중인 훈련병들을 두리번거리며 살폈고, 우리 또한 몰래 눈동자를 굴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반가운 얼굴을 찾아 헤맸다.
수료식 시작이 가까워질수록, 나도 연신 두리번거리며 여자친구의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수료식이 시작될 때까지, 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내 안의 감정은 더 이상 설렘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설렘이란 감정은 어느새 불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잘 도착하긴 한 걸까? 혹시 오지 못한 건 아닐까? 길을 잃은 건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행사의 진행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끝없이 뒤엉켰다.


(이미지 출처 : 한국일보)




수료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모든 훈련병들이, 입소 때와는 전혀 다른 우렁찬 구호와 함께 전방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우수 훈련병에 대한 시상이 이어졌고, 육군훈련소장의 훈시가 뒤따랐다. 소장님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가족들을 언급하며,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행사를 서둘러 마쳐야 한다며 짧게 훈시를 마쳤다.

드디어 기다리던 계급장 수여 시간.
“가족 여러분께서는 아드님에게 계급장을 부착해 주시기 바랍니다.”
행사 진행자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가족 대기석에서 수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우르르 앞으로 몰려나왔다.

그들 사이에서 여전히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바로 그때, 나를 향해 한 걸음에 달려오는 그녀가 보였다.

하얗게 빛나는 원피스,
그보다 더 눈부신 미소.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나 역시 두 팔을 벌려, 내 품으로 달려온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눈부신 하루였다.

그녀가 입은 원피스의 감촉은 부드러웠고,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 역시 눈두덩이 가득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내 가슴에 이등병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 짧은 인사 한마디로, 훈련소에서의 모든 나날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어찌 보면 한 달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를 갈라놓았던 그 시간이,
바로 그 순간,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녀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료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나의 존재를 알아본 그녀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만 머물러 있었다.

모두가 같은 옷, 같은 모자,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수많은 훈련병들 사이에서,
어떻게 그녀는 단번에 나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녀의 마음이, 그 시선을 이끈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3.06.13. 그날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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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