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https://brunch.co.kr/@6121f01a108340c/79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고, 노라의 몸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몰려온 충격파가 셔틀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쳤다. 흙과 나무 조각이 함께 휘말리며 폭풍처럼 기체를 덮쳤다. 그리고, 셔틀이 방향을 잃고 공중에서 비스듬히 몸체를 틀었다.
기체의 옆면이 숲의 나무줄기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꽈직—! 우지직—!
철과 목재가 함께 부러지는 소리가 뒤섞여 귀를 때려댔다. 그 충격에 셔틀은 숲의 경사면을 따라 바닥을 긁으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기체 아래쪽의 금속판이 지면과 마찰하며 불꽃을 튀겼고, 짙은 흙과 부서진 잎사귀들이 깨진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조종석안에 휘날렸다. 수십 그루의 나무가 셔틀의 궤적을 따라 부러져 나가며 짙은 나무 향과 탄내가 공기 속에 뒤섞였다.
셔틀은 한참을 미끄러지다가 거대한 바위에 부딪히며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멈춰 섰다. 마찰 열 때문인지 낙엽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새어 들어왔다.
기울어진 시야에 깨진 조종석의 유리창이 보였다. 그 창은 넘어 들어오는 차갑고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기체는 옆으로 완전히 누운 상태였고, 천장에 매달린 장비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기압이 불안정하게 변하며, 귓속에선 ‘웅—’ 하는 소리가 진동했다. 그 와중에도 ‘찌직 찌직’하며 전자기기에서 스파크가 튀는 소리와, 엔진이 천천히 식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쾌한 소리와 진동, 타는 냄새와 매캐한 공기, 그 모든 감각이 오히려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제야,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노라의 무게가 느껴졌다.
“노라, 이제…”
‘안전해요.’라고 말하려다, 내 어깨에서 힘없이 흘러내리는 그의 팔을 보고 숨이 멎었다.
나는 재빨리 그의 몸을 살폈다. 그리고 그 즉시,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조종석의 깨진 유리를 뚫고 들어온 두꺼운 나뭇가지 하나가, 노라의 복부,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안돼…”
입에서 새어 나온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안 돼요, 노라…”
그것은 신이 나에게 씌운 가혹한 운명의 고리였다. 나는 다시금 그 고리 속으로 끌려들고 있었다.
“안 돼… 죽으면 안돼… 제발…”
그 누구도 나와 가까워질 수 없다.
그 누구도 내 곁에 남을 수 없다.
나는, 그 필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손끝이 떨렸다. 그의 옷을 물들이고 있는 피가 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그게 아픔인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나를 삼켜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조종석의 불빛이 잿빛으로 번지고, 주위의 모든 소리가 느리게 늘어졌다.
머릿속이 비어 있었다. 뇌가 허공에 붕 떠 있는 듯,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어딘가로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이건 꿈일까… 아니면 벌인가…?
바닥의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검은손들이 나무 그늘 사이에서 솟구쳐 나와, 내 정신을 붙잡고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는 듯했다.
나는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그저 무너져가는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눈을 떠봐요, 노라…”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그의 옷은 붉은 피로 천천히 물들어갔다.
내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그의 얼굴에 떨어진 후 뺨을 타고 흘렀다. 그 한 방울의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크게 들렸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딜런은 벨트를 풀고 다가왔다. 그는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더니, 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곤 얼어붙은 듯한 표정으로, 그저 말없이 노라의 몸을 붙잡고 있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빛에는 놀람과 슬픔,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칼리뮤! 칼리뮤!!”
그때, 노라의 손목에서 들려온 목소리.
소피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음성은, 언제 들어도 침착하던 AI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거의 울먹이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칼리뮤! 노라는 아직 살아있어요! 어서 응급조치가 필요해요! 정신 차리고, 움직여요!”
그 말이 내 귓속을 찢고 들어왔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어둠 속에 끌려가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재빨리 그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아직은 생명의 온기가 남아있는 그의 위태로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 사실 만으로 나의 손끝에 다시 힘이 돌았다.
“수혈… 피가 필요해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손끝이 떨려왔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노라는 O형이에요!”
소피의 목소리가 노라의 손목에서 흘러나왔다. 전자음의 떨림 속에, 분명 인간의 감정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딜런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종석 뒤쪽의 의료실로 달려갔다. 나는 그 사이 노라의 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의 호흡이 점점 얕아졌다. 피부는 이미 차갑고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이 사라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제발…”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만 버텨요…”
잠시 후, 딜런이 의료팩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이거요! 이게 전부예요!”
나는 손끝으로 혈액팩의 라벨을 확인하고, 주삿바늘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바늘이 그의 피부를 뚫는 순간, 내 심장도 함께 찔린 듯했다. 붉은 피가 투명한 튜브를 타고 천천히 그의 팔로 흘러들어 갔다.
그리곤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은 채, 허리춤에 달린 가방을 뒤졌다. 금속의 마찰음이 짧게 울렸고, 이내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커다란 주사기와, 맑은 빛을 띤 투명한 금속 실린더. 그 안에서는 광택 없는 파란색 액체가 맴돌고 있었다.
딜런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뭐죠…?”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과 궁금증이 뒤섞여 있었다.
“비트라 링크...”
나는 낮게 대답했다.
“고대 네리안어로 ‘생명의 다리’라는 뜻이에요.”
나는 실린더 속의 용액을 살짝 흔들었다. 안에든 액체가 미세하게 요동쳤다. 그 움직임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흔들릴 때마다 은은한 형광빛을 내었다.
나는 재빨리 상의를 벗어던진 후, 손끝으로 척추선을 따라 더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우리 네리안 군인들은 이걸 ‘링커(Linker)’라 부르죠.”
나는 손끝으로 척추뼈 사이를 짚은 뒤, 다른 한 손으로 커다란 주사기를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딜런은 이해하지 못한 듯,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 주사기로… 뭘 하려는 거예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주사기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걸로 제 척수액을 추출할 거예요.”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기체 내부의 불빛이 깜박이며 우리 얼굴을 붉게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