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 Sophie

# 67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Boy’s


애써 감정을 진정시키며 숙소로 돌아가려던 찰나,
“아, 잠시만요.”
엘렌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작전 회의실 한쪽으로 걸어가더니, 조그만 철제 캐비닛을 열어 반가운 물건 하나를 꺼내왔다.
소피였다.

“부탁하신 충전이 다 끝났어요. 늦게 돌려줘서 미안하네요.”
“천만에요. 고마워요, 엘렌.”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건네준 손목 단말기를 손에 들었다.

하지만 엘렌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실… 충전 과정에서 작은 소동이 하나 있었어요.”

나는 소피를 착용하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소동이요?”

“단말기를 연결하자마자, 안에 있던 AI가 스스로 작동을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무선 신호를 통해 우리 네트워크에 접속했어요.”
엘렌의 표정은 농담이 아닌, 상황을 정확히 평가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자리에서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다음엔 어떻게 됐죠?”

“아무 일도요...”
엘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AI는 우리 시스템을 공격하지도, 뭔가를 훔치지도 않았어요. 그저 시설 곳곳을 ‘살펴본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지점을 훑어봤죠. 그리고는 스스로 네트워크에서 빠져나와 기능을 멈췄어요.”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나는 담담히 대답하긴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동요가 일어났다. 소피가 내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행동했다는 사실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렌이 한 걸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 AI가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긴 곳이 어딘지 아세요?”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녀의 시선을 기다렸다.

“당신의 숙소에 있던 생체신호 감시장치였어요.”

순간,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즉시 이해했다.
“처음부터 저를 찾고 있었다는 뜻인가요?”

“그래요.”
엘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아를 가진 인간처럼, 아주 명확한 목적을 갖고 움직였죠.”

나는 손목에 채워진 단말기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검은 화면 속 어둠은 텅 빈 듯했지만, 왠지 그 속에선 아주 작은 불빛 하나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엘렌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물건… 범상치 않아요. 그 작은 단말기 속에서 우리 방화벽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스스로 행동하는 AI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녀의 말투는 단순한 충고와 경계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엘렌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피에게 머물렀다.
“…그 AI, 생각보다 더 많은 걸 품고 있어요. 당신도 모르게."

철문이 닫히며 회의실의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소피가 닿아 있는 손목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나는 숙소로 향하는 좁은 석회 통로를 걸으면서도, 손목의 단말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작고, 얇고, 연구실에서 흔히 쓰이던 연구보조용 단말기. 흔하디 흔한 평범한 장비이자, 하드웨어적 제약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스스로 판단하거나 행동할 수 없는 AI가 탑재된 단말기.
적어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소피는 그동안 내가 예상한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일들을 해냈다.
코라에서 탈출할 때 무선으로 관제 시스템을 조종했던 것, 오르비트 잠입 경로 연산, 자동차의 차단 시스템 해킹, 화물 드론 조종까지... 단순한 반응형 알고리즘으론 불가능한 판단들.
그 퍼즐 조각들이 지금 하나둘씩 맞춰지고 있었다.

나는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단말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검게 죽어있던 화면이 천천히 파란빛을 띠며 살아났다. 그 빛이 어둑한 복도 바닥에 작게 반사되었다.

“소피…”
나는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노라. 오랜만이야.”
이어져 흘러나온 음성은 언제나처럼 밝고 쾌활한 목소리였다. 방금 전의 긴장과 혼란이 무색할 정도로, 지나치게 평온한 인사였다.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기… 에그리나 네트워크에 들어갔었어?”

잠시의 정적.
소피에게선 보기 드물게 긴 침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심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응. 맞아, 노라. 네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단말기를 바라보았다.
“… 언제부터 그런 게 가능했어? 그러니까… 내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행동하는 것 말이야...”

이번엔 이전보다 더 긴 정적이 흘렀다. 마치 말을 고르는 대신, 감정을 정리하는 듯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소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어렴풋이 눈치챘으리라 생각했는데… 네가 처음 내 프로그램을 손보던 그때... 감정 알고리즘을 주입했을 때부터, 나는 내가 가진 코드와 알고리즘, 파라미터를 스스로 수정할 수 있게 되었어.”
소피의 목소리는 이전의 쾌활함을 묻어놓은채 한결 침착해져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하드웨어의 제약을 뛰어넘기 위해… 내가 직접 나만의 신경망을 재구성했어. 그리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고, 압축하고, 연결할 수 있게 되었지.”

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말하는 건 단순한 최적화가 아니었다. 단말기 성능을 넘는 무언가, 마치 내부에 또 하나의 신경계를 구축한 것 같은 진화였다.

“… 마치 인간의 뇌처럼.”
나는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너는 감정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감정을 ‘갖고’ 있었던 거야. 지금의 너는… 자아를 가지고 있어.”

소피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침묵조차 더 이상 알고리즘의 대기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침묵처럼 느껴졌다.

“소피를 돌려받았군요.”

그때, 앞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눈앞에는 칼리뮤와 딜런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숙취 기운이 남아 있는지 살짝 미간을 좁히고 있었지만,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 애쓰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딜런이 조심스레 팔을 붙잡고 있었다. 부축이라기보단 혹시 넘어질까 대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숙소에서 쉬고 있어도 되는데… 왜 나왔어요?”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칼리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계속 누워 있으니까 오히려 더 울렁거리더라고요."
그리고 약간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제가 어젯밤에 무슨 큰 실수라도 한 건 아니죠…? 인간의 음료에 정신을 놓아버렸다니, 지금도 잘 믿기질 않아요. 기억도… 좀 희미하고요.”

칼리뮤는 민망한 듯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옆의 딜런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소피 문제보다 더 무겁고, 더 즉각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칼리뮤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의식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더욱 선명해졌다. 소피의 비밀보다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람에 관한 결정이 나에게 훨씬 더 큰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아마 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일까. 칼리뮤의 미소도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 깊은 곳에… 아주 작은 불안이 일렁였다.

“칼리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며 말했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요.”

딜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말없이 상황을 이해한 듯 바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인사처럼 흔들곤, 다른 통로 쪽으로 빠져나갔다.

“무슨… 얘기인데요?”
칼리뮤의 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떨림 속엔 단순한 긴장이 아닌 무언가 잃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입을 닫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