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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by 더블윤

이 글은 연재 중인 장편 SF소설입니다.
첫 화부터 감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Boy’s


아이작과의 면담이 끝난 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다.
칼리뮤는 어느새 에그리나의 어린아이들과 가까워졌고, 종종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흐르는 지하수에 발을 담근 채 아이들과 웃음을 주고받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밝고 부드러운 표정의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곤 했다.
엘렌이 우리를 다시 찾아왔을 때는, 우리가 에그리나에 도착한 지 벌써 나흘째가 되어가는 밤이었다. 숙소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들어온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그녀가 이미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엘렌은 잠시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숨인지 숨 고르기인지 모를 짧은 숨을 내쉬었다.

“… 승인됐어요.”
조용한 그 한마디가 방 안에 가라앉았다.
“노라, 칼리뮤. 당신들의 제안이 지구의 자녀 대륙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 말이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내 감정이 그대로 느꼈는지, 칼리뮤는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았다. 내가 그녀를 돌아보자, 칼리뮤는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고마워요… 엘렌.”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뇨. 제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엘렌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건 당신이 이루어낸 것이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전쟁은… 원해서 택한 길이 아니라 강요된 선택이었어요. 그런 우리에게 당신은 전혀 다른, 희망이라는 길을 보여줬죠.”

나는 고개를 들어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밀어 보인 손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오히려 제가… 개인적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군요. 그리고…”
엘렌은 아주 미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와 끝까지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짧지만 묵직한 악수를 나눴다. 그 짧은 순간 안에, 그녀의 결심과 신뢰가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다음 날, 우리가 다시 엘렌을 만난 곳은 에그리나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전 회의실이었다.
회의실 천장에는 거미줄처럼 얽힌 케이블과 노출된 배관이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고, 전력 공급이 부족한 탓인지 전등은 최소한의 조도만 유지하고 있었다. 희미한 백색광 아래, 금속 벽면은 차갑게 식은 듯 은빛을 띠며 빛났다.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전술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위로는 내가 알려준 코라의 구조도, 그리고 지구–달–화성의 함선 배치도가 반투명하게 떠 있었다. 각 구역에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마커가 천천히 점멸하며 움직였고, 데이터가 갱신될 때마다 작은 전자음이 방 안 공기를 미세하게 떨게 했다.
벽 한쪽에는 낡았으나 여전히 작동하는 전술 스크린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모서리가 깨진 터치 패널과 오래된 무전기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전부 과거의 잔재 같은 장비였지만, 곳곳에 정성스러운 보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곳이 생존을 위해 버티고 싸워온 사람들의 장소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 가운데, 엘렌과 딜런이 몇 명의 요원들과 함께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엘렌은 간단한 작전 개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코라에 침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가기 위해 먼저 지구를 떠나는 과정이었다. 딜런의 설명에 의하면, 지구에서 우주로 발사되는 모든 물체는 루나포트의 자동 감시망에 걸리며, 코어리움 기반 양자 가속기가 없는 기술로는 GU의 추적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지구의 기술력만으로는 정면돌파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결국 내려진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잔혹했다.

“지구의 자녀가 코라로 향하려면…”
엘렌이 테이블 위의 마커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나포트 감시망을 뚫기 위한 대규모 교란 전투가 필요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문장 하나하나가 회의실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희생은 피할 수 없습니다. 거의… 자살 임무가 되겠죠.”
엘렌의 말이 끝나는 순간, 회의실에는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침묵이 찾아왔다.

나 또한 그 현실 앞에서 단 한 마디의 반박도 하지 못했다. 입으로는 전쟁 없는 길을 말했지만, 그 길 역시 피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엘렌은 방 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미래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영원한 평화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값진 피를 흘릴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 말은 꾸밈없고 담담했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작전회의는 잠입팀 구성으로 이어졌다. 코라 잠입팀은 나와 칼리뮤, 딜런, 기술요원 2명, 최정예 전투요원 6명. 많지 않은 인원이었지만, 내가 제공한 코라 내부 정보를 바탕으로 함장실까지의 최적 동선이 설정되었고, 아직 코라에 탑승해 있는 블레어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설령 로쉬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코라의 통신 시스템만 확보할 수 있다면 인류 전체에게 지구의 진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 지점에 도달하기만 해도… 이 작전은 사실상 성공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우리를 코라로 보내기 위해선 분명 희생이 뒤따르게 될 것이었고, 그 무게가 회의 내내 내 표정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리뮤도 마찬가지였다.




칼리뮤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던 것을 확인한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에 물었다.
"칼리뮤. 무슨 고민 있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노라. 그저... 조금 긴장했나 봐요."

애써 무던한 듯 표정을 바로잡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의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갈등이 그녀의 박동을 타고 내게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그날 밤, 우리의 숙소에는 딜런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병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잔뜩 들뜬 표정의 딜런이 바닥에 병과 컵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뭔지 맞춰볼래요?”

“뭘 가져온 겁니까…?”
칼리뮤가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딜런은 환하게 웃으며 병을 탁탁 털어 올렸다.

“술이에요, 술! 이걸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기절할걸요?”
그는 능숙하게 병뚜껑을 따고는 빛바랜 컵들에 투명한 액체를 콸콸 따라 붓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얼굴 보자마자 들이미는 게 술이에요?”
나는 어이없어 웃으며 말했다. 딜런의 장난스러운 모습에서, 그는 무거운 현실을 잠시라도 지워보려는 듯 보였다.

“아까 회의실에선 아는 척도 안 하더니,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묻자,

“말도 마요. 죽을 고비 넘기고 지구에 왔더니, 며칠 동안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취조당하듯 설명해야 했어요. 진짜 잡혀온 줄 알았다니까요?”
딜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들린 컵에 술을 채웠다.

칼리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컵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냄새를 맡아보며 경계하는 듯했다.

“칼리뮤 씨네 종족도 술이란 게 있어요?”
딜런이 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칼리뮤는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리안 문명을 무시하는 건가요?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 종류로만 따지면, 아마 우리가 훨씬 다양할걸요.”

딜런이 감탄한 듯 웃었다.
“와! 그럼 칼리뮤 씨도 술 마실 줄 아는 거예요?”

“당연하죠. 고작 화학 합성 음료 따위 제가 못 마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칼리뮤는 그렇게 말하더니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노라, 당신은 정말… 바보예여.”
칼리뮤가 잔뜩 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칼리뮤… 이제 그만 마셔도 돼요. 많이 취한 것 같아요.”
내가 타이르자 그녀는 손을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닛! 그렇치 않아요… 저는 네리앙이랍니다. 이런 알콜음료에 취하징… 않아요…”
그녀는 내 얼굴 가까이로 들이밀며 눈을 반짝였다.
딜런이 맞은편에서 “푸흐흐…” 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 봐요, 노라!”
내가 억지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자, 칼리뮤가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바보인지 알아여…? 아쭈우— 힘든 길만 골라가려 하잖아요… 내가, 내가 걱정돼서… 못 살겠어요…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봐…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구여…”

그 말을 끝내자마자 칼리뮤는 쓰러지듯 내 무릎에 기대 잠들었다. 새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자, 딜런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칼리뮤 씨는 노라를 엄청 좋아하나 봐요!”
“시끄러워요.”

나는 투덜거리며 컵에 남은 술을 목구멍 안에 털어 넣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 이유가 술 때문인지, 아니면 무릎 위에서 자고 있는 그녀 때문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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