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힘

1-3. 교육이 이끈 사회(1)

by 더블윤

기원전 6세기 무렵. 이 시기 인류는 지구 곳곳에서 문명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다양한 문명들이 새로이 나타났다가 역사 속 유적으로 사라져 가기를 반복했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왕과 귀족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고, 쌓여 가는 지식 속에서 학문은 점차 다양하고 정교해졌지만, ‘지식’이라는 전문적 배움은 여전히 모든 이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마치 시대를 초월한 듯한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초기의 그리스 문명은 다른 문명들과 다르지 않았다.
소수의 귀족들이 대토지를 독점하고,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이나 채무노예로 전락했으며, 빚을 갚지 못한 시민이 자신의 몸을 담보로 노예가 되는 제도(채무노예제)는 사회적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로 인해 빈곤한 농민과 도시 하층민은 봉기 직전에 이르렀고, 귀족 간의 권력 다툼까지 더해져 시민 공동체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이러한 때, 귀족 출신이면서도 상공업에 관심이 많고, 시와 정치, 철학에 능했던 중도적 개혁가가 등장한다.
그는 양극단을 모두 설득할 수 있는 신뢰받는 중재자로 선출되어, ‘일시적 입법 권한을 지닌 자(집정관, 아르콘)’에 임명된다.
그의 이름은 바로, 그리스의 일곱 현인 중 한 명이자 아테네 정치의 혁명을 이끈 인물, 솔론이다.

솔론은 당시 아테네의 현실을 직시하고, 귀족과 평민 사이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채무노예제를 폐지하고, 시민 계층에 따른 정치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아테네의 모든 시민(성인 남성)이 국가의 정책 결정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이 개혁은 아테네 문명의 방향을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게 만든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기원전 6세기말, 솔론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클레이스테네스는 추첨제 공직, 민회(에클레시아), 500인 평의회 등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실질적인 ‘민주정(demokratia)’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접어들며 민주주의의 황금기를 맞는다.
시민 모두에게 정치 참여의 권리와 의무가 부여되었고, 그리스의 불멸의 문화, 예술, 철학 또한 이 시기에 활짝 피어났다.


솔론의 개혁은 단순한 제도 개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기를 ‘배움을 통한 통찰’로 돌파한 사례였다.


“나는 힘 있는 자들에겐 경계를, 약한 자들에겐 방패를 주었다.”

- 솔론


그의 말처럼, 그는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고, 법과 제도를 통해 조화로운 공동체를 설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도는 시민이 더 이상 무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즉, 솔론은 자신의 배움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길을 찾았고, 시민 개개인의 배움이 공동체를 조화롭게 만들어갈 것이라 믿은 사람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고대 문명에서 교육은 통치를 위한 도구였다.
민주정이 들어선 아테네 또한 통치를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지만, 그 ‘결’이 달랐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곧 '배운 사람들의 정치'였다.
그래서 교육은 곧 정치 참여의 자격을 부여하는 핵심 수단이었으며, 그 목적은 좋은 시민을 기르는 데 있었다.
국가 주도의 공교육 제도는 없었지만, 시민이 되려면 반드시 배워야 했고, 교육은 가정과 개인 교사(파이다고고스)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어릴 적 가정에서 도덕, 예의범절, 신화, 기초 문장 등을 구술로 배우며, 공동체의 기본 규범을 익혔다.
이후에는 문자(읽기·쓰기), 수학, 음악, 체육 등의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음악과 체육은 몸과 마음의 조화, 즉 ‘탁월한 인간’의 조건으로 중요시되었다.

청소년기에는 시를 낭송하고 철학적 대화를 나누며 사유력과 미적 감각을 키우는 교육이 이루어졌고,
이후 ‘에페비아’라 불리는 성년식 과정을 통해 정식 시민으로 정치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교육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성인이 된 시민들은 수사학, 철학, 논리학 등을 배우며 아카데메이아나 다양한 학파의 교육기관에서 끊임없이 사유하고 토론했다.
이곳에서 철학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기하학 등의 고등 학문도 발전하게 된다.


플라톤 시대의 아카데메이아에서 토론하는 그리스인들을 묘사한 그린 모자이크화 /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


이처럼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는 민주주의 아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인간다운 인간’을 양성해 나갔다.
마치 오늘날의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교육 체계를 연상케 할 정도로 분화된 구조였으며,
그 핵심에는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즉 아름다움과 선함의 조화를 이룬 인간상이 놓여 있었다.

교육은 곧 자유 시민으로서의 성숙, 공동체에 대한 책임, 자기 성찰과 통제 능력을 기르는 도구였다.
아테네의 교육은 통치를 위한 제도였지만, 그 목적을 넘어 학문과 문명의 씨앗이 되었다.




물론, 시민은 성인 남성으로 한정되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다른 문명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아테네의 교육은 실제로 사회·문화·정치·예술·철학 전반에 걸쳐 눈부신 성과와 영향력을 남겼으며, 오늘날 서양 문명의 기초가 된 학문과 사유의 뿌리 역시 이 교육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아테네의 교육 모델은 르네상스 인문주의, 계몽주의의 합리성 교육, 현대 자유교육의 기초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찬란한 황금기 속에도 그림자는 존재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직접 참여를 기반으로 했지만, 이성적 토론 없이 감정에 휘둘릴 경우 대중 정치로 쉽게 전락할 수 있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다수 시민의 투표로 결정된 사건이었고, 플라톤은 그것을 ‘무지가 진리를 죽인 순간’이라 평했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장기화는 경제적 피폐, 전염병, 시민 피로를 불러왔고, 이성적 정치 문화는 쇠퇴하고, 대중 선동가(데마고그)들이 목소리를 키웠다.


교육의 부재, 대중의 무지, 감정적 판단은 '선동'의 좋은 희생양이 되고 만다. 대중들의 '배움'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에 따라 시민들은 비판 없이 선동에 이끌려가는 존재로 퇴행하게 되었고, 교육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수단에서 이익을 위한 기술로 전락했다.

수사학은 진리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권력과 이익을 위한 무기로 퇴색해 갔다.




아테네의 정치는 교육으로 바로 설 수 있었지만, 교육이 무너지자 정치도 함께 무너졌다.
교육의 쇠퇴는 곧 문명의 쇠퇴를 불러왔다.

한때 찬란했던 아테네는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 민주정의 구조적 한계, 지도자의 부재와 엘리트 교육의 단절 속에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를 제압하며, 아테네는 독립된 정치 주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에 통합되며,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 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테네의 몰락은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미성숙과 교육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작은 도시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인류 사유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교육’에 있었다.
그러나 교육이 약화되고, 지도력이 사라지고, 감정이 이성을 앞서기 시작하자,
문명은 더 이상 스스로를 유지할 힘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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