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다시 쓰다

1-3. 교육이 이끈 사회(3)

by 더블윤

다시 시계를 되돌려 태고의 생명이 탄생했던 시기로 가보자.

당시 척박한 지구의 환경 속에서, 생명이 그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선 배움을 통한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적응’과 ‘진화’라 표현한다.

생명은 그 존재의 시작부터가 배움의 연속이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다. 외부 자극에 의한 세포 단위의 조정과 그를 통한 진화, 곧 ‘변화’. 이것은 생명이 생명다울 수 있었던 하나의 크나큰 조건이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에게는 더 이상 생존을 고민해야 할 척박한 환경도, 세포를 조정해야 할 만한 외부 자극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인류는 진화를 멈춘 생물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이제 인간의 배움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그들 존재의 변화를 꾀하고 있는 생물이다.

그 모습이 이전과 다를 뿐, 인간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생명인 것이다.


교육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교육은 배움의 형식을 갖추게 하고, 그 배움은 다시 인간의 내면을 흔든다.

사유가 바뀌고, 감정의 방향이 달라지며, 결국 존재의 구조가 재편된다. 그렇기에 교육은 인간을 다시 쓰는 도구이다.

과거의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그 선택지를 열어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우리는 지구상 모든 생물 중에서, 교육을 통해 원하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일지도 모른다.


모든 생물은 본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한 생물종이 진화하는 데 걸린 시간을 봐도 그러하다.

인식이나 의식의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습관, 감정, 기억, 그리고 환경.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 동안 단단히 굳어진 껍질처럼 인간을 감싼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때로는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인간을 변화시킬 힘을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육일 것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은 교육이야말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정약용에게 있어 인간은 본래 선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지만, 그것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문을 통한 수양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가 말한 ‘배움은 곧 마음을 닦는 일’이라는 말은, 단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변화를 말한 것이며, 그는 교육이 사람을 바로 세우고, 바른 사람이 세상을 바르게 만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학문은 곧 삶과 사회를,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류라는 그들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수단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의 저서 『목민심서』와 『흥사문』 등의 글에서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그는 “한 번 배운 것을 멈추는 것은 마치 물이 고여 썩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하며, 인간은 배움을 멈추는 순간, 존재의 변화 가능성을 잃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보았으며, 이는 곧 배움이 인간됨의 본질, 다시 말해 배움 자체가 인간 존재의 의의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이유로 정약용은 모든 인간에게 배움이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로도 노비나 여성, 백성에게도 배움의 기회, 즉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다산 정약용. 조선의 실학자이자 철학자, 법학자, 유학자였으며, 심지어 의학에 대해 저술을 하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니 꼭 살펴보길 바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신분 사회에서의 배움은 여전히 양반만의 특권이었고, 정약용이 바랐던 변화는 결국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선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약용의 꿈이 이루어진 곳은 지구 반대편의 대륙, 유럽이었다.


중세 유럽의 인간은 왕과 신의 뜻에 순응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18세기 시작된 계몽주의 운동은 인간에게 이성과 자유의 권리를 돌려주었다.

“모든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변화할 수도 있다.”

이 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삶뿐 아니라, 국가까지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 사유할 수 있으려면, 먼저 배워야 했다. 문자 해독, 논리 훈련, 비판적 사고 능력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교육은 인간의 내면에 질문을 심었고, 그 질문은 “나는 누구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에서 “이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중교육(Public education), 즉 국가 주도의 교육이 가장 먼저 시행된 곳은 절대왕정 체제의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프로이센은 국민 개개인이 국가의 명령에 따르고, 질서를 중시하며, 종교적·도덕적 통일성을 갖추길 원했다. 즉, 국민을 통제 가능하고 규율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써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이는 민주 국가의 ‘배움의 평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교육이 인간에게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국민을 순종하는 존재로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이라는 도구를 이용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은 인간이 신이나 왕이 아닌, 스스로가 국가의 주인임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국가는 더 이상 왕의 나라가 아니었다. 국민이 국가를 만든다는 개념, 즉 ‘국민국가(nation-state)’가 태어난 것이다.


《바스티유 습격》 / 프랑스 시민혁명을 표현한 그림. 계몽주의자들의 목소리와 루소의 '사회계약설'이 민중의 혁명을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국가는 복종하는 신민이 아니라, 사유하고 책임지는 시민이라는 새로운 인간을 필요로 했다. 국민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유·평등·공공성의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중교육이 제도화된 철학적·정치적 이유였다.

진정한 의미의 공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새로운 인간상이 요구되었다.

기계를 다루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며, 협업과 규칙을 익히는 존재. 국가와 산업은 지식과 훈련을 갖춘 새로운 대중을 원했고, 공교육 시스템은 이들을 길러내는 장치가 되었다.


이처럼 계몽주의 철학, 국민국가의 등장, 산업사회의 도래가 맞물리며 국가는 국민을 ‘기르는’ 시대로 돌입했다.

이제 교육은 단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설계하는 수단이자 시민을 창조하는 배움의 도구가 된 것이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대중교육 제도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단지 ‘모두가 학교에 간다’는 표면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대중교육이 국가 제도 속으로 들어오자, 인간은 다른 방식으로 길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식을 익히고, 타인과 협력하며, 생각을 나누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탄생이었다.


배움의 평등은 곧, 기회와 권리의 평등을 의미하기도 했다.

문맹률이 낮아지며, 적절한 소통의 창구만 제공된다면 누구나 사회와 국가를 향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문자는 더 이상 그들만의 도구이자 무기가 아니었다.


지식은 왕래하고 공유되며 그 깊이를 더하였다.

수많은 이론, 실험, 관찰 등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탐구되었고, 수많은 질문과 사유가 축적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대중교육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모든 사람이 ‘질문하는 법’을 배우게 한 것이다.

교육은 타인의 생각을 듣는 법, 자기 안의 기준을 세우는 법, 그리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지시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었고, ‘왜?’라고 물으며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라고 상상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교육이 인류에게 준 가장 근본적인 변화였지만, 오늘날 ‘공교육’이라는 당연시되는 특권 아래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소중한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 권리, 사고의 틀은 바로 그 교육의 결과인 것이다.




과거의 인간은 세상을 바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배우지 못했기에, 세상이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바뀔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조차 몰랐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지식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사회 변화의 필요성을 소리 높여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들은 배웠고 알고 있기 때문에 개혁의 목소리를 세상에 외쳤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다.

한 문장의 철학이 사람을 바꾸고, 한 권의 책이 사회를 흔들며, 한 사람의 사유가 세상을 다시 쓰기도 한다는 것을.

배움은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고, 교육은 배움을 통해 인간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다.


교육은 먹고, 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이 전부였던 인간을 토론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교육은 도덕적인 사람, 질문하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을 만들었으며,

심지어 혁명과 혁신의 씨앗을 품은 사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신도 그 교육의 계보 안에 서 있다. 당신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증거다.


그러므로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키는 사명을 가진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바로 그 변화의 힘이 교육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며,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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