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교육이 이끈 사회(2)
문득 중학생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학교는 집에서 멀지 않아, 창밖으로도 교정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이 몹시 귀찮았다. 아침이 되면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외면한 채 이불속에서 몸을 웅크리곤 했다. 결국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이불을 걷어내고, 비몽사몽 한 눈을 비비며 학교에 향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내 딸도 그때의 나처럼 아침마다 이불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다.
오늘날 학교에 가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너무 당연해서일까, 때로는 이 권리이자 의무인 학교라는 공간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학교는 처음부터 모두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고대와 중세의 학교는 신관과 귀족을 위한 훈련소였고, 성직자의 침묵을 배우는 장소였다.
그러던 중, 인간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학교는 벽을 허물고 세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인문주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천 년 넘게 유지된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은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만 제한했고, 교육도 오직 신학과 교리를 암기하고 복종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 전염병(흑사병), 교회의 타락(면죄부 등) 등으로 신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비잔틴)의 학자들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후로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 문학, 예술, 과학이 다시 소개되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 등 고전 문헌의 라틴어·그리스어 번역이 붐을 이루었다. 이 고전들은 인간의 감정, 이성, 도덕, 미(美)를 신이 아닌 인간 자체의 문제로 다루고 있었고, 이는 중세 교리 중심 사고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이러한 배경과 사람들의 사고 변화는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회복시키며, 교육을 고전 재발견과 탐구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을 벗어나, 인간이 자신과 세계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고전의 재발견과 문자의 보급(인쇄술)은 배움을 정교하게 분화시키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인문주의가 부활하며, 배움은 더 이상 외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묻는 것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질문은 유럽을 르네상스 시대로 이끌었다.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자 학교는 교회에서 도시로 향하기 시작했다.
유럽 곳곳에 위치했던 문법학교(Latin Grammar School)는 여전히 라틴어, 성경, 논리학 중심의 교육을 이어나갔지만, 교육의 목적은 성직자 양성 목적에서 벗어나 시민 계층의 교양 교육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인문주의 학자들은 사설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페트라르카, 비토리노 다 펠트레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고전 교육을 중심으로 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르키메데스를 되살리며 ‘좋은 인간’, ‘생각하는 시민’을 기르는 전인교육을 시도했다.
대학 또한 신학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중세 대학은 신학·법학·의학 중심이었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며 인문학과 자연철학의 비중이 확대되었다.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캠브리지, 바젤 등 유럽 주요 대학에서 인문주의자들이 고전 번역, 주석, 문법·윤리 강의를 통해 교육 개혁을 주도하였고, 이는 교회가 아닌 학자들에 의해 지식이 생산되고 공유되는 공간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매우 큰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학교들이 등장하고, 인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질문하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육의 패러다임이 중세의 일방적 암기 위주 교육에서 능동적 탐구형 교육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고전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였으며, 수사학 훈련을 통해 시민으로서의 발언 능력을 훈련했다.
인문학은 곧,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를 알려주는 학문이었다.
인문주의(Humanism)는 고전 문헌의 복원과 해석을 통해, 인간이 단지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기 판단과 의지를 지닌 존재임을 강조했다. 이 사상이 교육, 정치, 예술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사유하는 태도’를 가능하게 만든 토양이 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다시 바라보고 인간을 다시 배우게 되자 사람들은 사유의 토양 안에 새로운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바로, 자연과학이라는 씨앗이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 등 다양한 철학가에 대한 배움은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이성적 탐구의 기초가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고대 위대한 철학가들은 모두 존재와 자연에 대한 사유로 그들의 생을 불태웠으니 말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신부가 되기 위해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대학교에 입학하는 이들의 목적은 성직자나 의사, 법률가가 되기 위함이었고 그도 그러한 목적을 갖고 대학에 입학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교를 다니며 자신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배움을 얻게 된다.
그가 입학한 크라쿠프 대학교에도 인문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일반학문과 예술을 배우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교수인 알베르트 브루제프스키에게서 수학과 천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의 논리적 모순, 그리고 이 천동설 우주와 알폰소 천문표 목록과의 불일치를 알게 되었다.
당시 교수들의 교수법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술들을 분석하고 해설을 달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해설서들을 공부하고, 동료들과 토론하며 후에 펼칠 자신의 사상의 밑거름을 쌓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유의 능력을 바탕으로 의심과 관찰, 계산을 수십 년간 비밀리에 정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동설의 우주를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천재성을 되짚어보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
여기서 되짚고 싶었던 것은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사유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인문주의가 이끈 교육의 변화였다는 사실이다.
교육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창조’하는 도구로 진화한 것이다.
인문주의 교육은 단순 암기가 아니라, “왜?”를 묻는 존재를 길러내는 것이었다.
이 자율적 사고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수학적 천문학, 갈릴레이의 실험물리학,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으로 이어졌다.
교육의 변화가 가져온 놀라운 배움의 기적이었다.
아테네의 교육이 인간을 시민으로 만들었다면,
르네상스의 교육은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혹시 지구가 움직인다면 어떨까'를 상상하며 지동설을 제시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신이 만든 인간의 몸이 과연 그렇게 단순할까?' 질문하며 해부학의 시작을 열었다.
그들의 사유는 종교 중심의 사회를 인간과 이성 중심 사회로 돌려놓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수사학에서 영감을 얻어 수학을 자연과학의 공용어로 만들었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은 “진리는 책 속에 있는가, 아니면 자연 안에 있는가?”라고 질문하며 귀납법이라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정립했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이성 중심의 진리 탐구 철학을 정립하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생각하고 질문하는 인간만이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생각하는 인간은 다시 세계를 묻기 시작했다.
이성은 신을 넘어 별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은 마침내 진리를 향해 닿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거인들의 사유가 쌓이고,
그들의 지식과 배움이 쌓여,
사과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던 젊은 청년에게
놀랍고도 새로운 질문을 이끌어내게 된다.
왜 사과는 떨어지고, 달은 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