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나절, 시를 읽으며 떠올린 ‘침묵’을 생각해 본다.
침묵이란 그저 아무 말 없이 잠잠히 있는 것, 혹은 어떤 일에 대하여 비밀을 지키는 것이라면, 침묵이라는 무겁고 단단한 말에 어울리지 않는 해석이다. 침묵이란 그저 사전적 의미만을 이해한다고 해서 설명될 종류의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어에 무게를 달고 있다. 그 무게는 인간이 감당하거나 논리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만큼의 묵묵함과 침착함을 품고 있다. 침묵은 정적의 극치이며, 제 무게를 견디는 힘이다.
한용운 시인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대해 말했다. 그 첫 키스는 자신의 운명의 지침을 놀려놓고는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의 님에 대한 사랑은 아리고 저리다.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는 그의 말은 희망적이고 위로가 된다. 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는 신앙적이지 못하고 세속적이다. 이런 시인을 성토하고 극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따로 있으니, 풀이 죽은 회한 속에서 발견한 님이 남긴 침묵이다.
한용운 님의 침묵은 어지럽지 않고, 굳고, 곧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쓸어 내고, 깊고 단단히 결심하게 하는 것은, 바로 제 무게를 견뎌내는 침묵 때문이다.
윤동주의 '자화상'은 말이 없는 시다. 시인은 말을 하지 않지만, 숨죽여 지켜보는 눈길을 따라 그대로 시가 되었다.
외딴 우물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사나이는 밉고, 가엾다. 다시 돌아가 보면 언제나 그대로 있는 사내가 밉고, 또 그리워진다. 오도 가도 못 하는 불운의 사내는,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흘러가는 가운데 말을 잃은 채 그저 존재한다.
시인은 말을 빼앗고 자유를 강탈한 자들과 화해하지 않는다. 다만 우물에 있는 하느님을 닮은 침묵의 사람을, 오래 추억처럼 기억할 뿐이다. 시를 쪼개고 비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시를 두고 자아 성찰의 메타포라고 추앙한다. 시에는 시대정신이 담뿍 담겨서 민족 정서를 대변하는 은유라고도 한다. 인정한다.
내가 온전히 그 말에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순전히 내가 그 사내를 인간적으로 편애하기 때문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나는 동주라는 사내가 우물에 가서 발견한 것이, 구름과 하늘, 바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를 향한 부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시대의 우물에 갇힌 자신과 달리, 말없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달과 구름을 마주하며, 거기 서 있는 자신을 향한 채찍질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같지만, 모든 것에 대답하고 집요하게 버틴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면, 말 없는 기도는 공허하게 흩어진다.
한용운이 경험한 첫 키스의 날카로운 기억은 이별의 고통에도 파괴적이지 않고, 오히려 침묵에 순응하게 한다. 윤동주가 말없이 쓴 시는 내면세계를 가만 들여다보게 한다. 그의 시는 무도(無道)한 시대를 침묵하는 자신을 향한 돌팔매 같은 것이었다.
한때 침묵하는 것이 곧 자신을 지키고, 억압에 굴하지 않는 저항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아껴야 할 때 아끼며, 그 선택의 무게를 끝까지 견디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묵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