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핀다

by 이채이

첩첩이 눈 쌓인 겨울 산을 떠올린다. 겨울철 남도에 눈이 내리면, 세상을 덮어버린 눈의 위력보다, 사이사이로 엿보이는 시누대의 진초록이나, 동백의 희고 붉음이 더 강인해 보인다.


겨울과 봄이 겹쳐 오는 남도. 애써 피어난 가지런하고도 정직한 동백의 미소가 눈 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다. 이 설정은 겨울의 남도가 제 색감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

겨울자락에도 이미 볕이 스며들어, 남도에는 가장 먼저 봄이 온다. 눈이 내리면서도 봄이 겹쳐지며 함께 온다.

봄을 애타게 기다린 이는 목련이다. 목련은 지난가을부터 솜털 자루 속에 꽃눈을 숨긴 채, 잎이 소멸하는 세계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죽어가는 것들에게 진실을 묻지 않고 숨죽여 긴 시간을 인내했다.

목련은 햇살 터지는 어느 날 아침, 제 몸의 자루를 찢고 세상에 온다. 가장 먼저 봄을 열고, 또한 가장 먼저 떨어지는 목련. 그 꽃은 하얀 피를 머금은 듯하다.

열다섯 살 박용주는 '목련이 진들'이라는 시를 썼다. 전남 고흥의 풍양중학교 2학년이었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

나는 목련에 관한 단상으로는 박용주의 시를 최고로 여긴다. 가지마다 꽃등을 달고 봄의 전령을 자처하는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그의 목련은 5월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을 기리는 꽃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물 앞에 서면, 나의 목련은 맥없이 떨어지고 만다. 목련이 가진 정형의 부정형을, 시의 언어로 번역하고 윤색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긴 시간 동안 시를 쓰려하는 순간마다 '우리네 오월'이 나를 가로막고 섰다. 모퉁이를 돌아 숨을 고를라치면 '눈물로 지는' '그 희고 정갈한 것'이 눈을 가렸다. 그 목련 앞에서 나는, 내 안의 언어가 눈처럼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다.

남도의 색과 빛을 그리는 화가들을 알고 있다. 남도에서 목련이 지는 것을 애달파하는 이가 화가 한부철이다. 그는 유화의 질감이 나는 수채화를 그린다.

나는 그의 화실에 들렀던 기억이 있다. 젊은 화가는 '그린다'는 행위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빛과 색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그저 그려지고 있었다.

훗날 다시 본 그의 그림은 더욱 담담해져 있었다. 우리가 잊고 지내는 소소한 개망초나 떨어져 버린 동백, 흩날리는 꽃잎을 그리고 있었다. 산 것과 죽은 것들 사이에서, 어둠 속에 떨어지는 목련이 있었다.

나는 세월을 건너, 박용주의 목련과 한부철의 목련이 서로를 불러내는 장면을 상상했다. 남도의 땅에서 한 생을 살고 있는 꽃들과, 낙화의 순간을 자신에게 끌어당긴 두 사람의 마음을 기억했다. 그들의 마음은 목련에 닿아있었다.

각자 자기만의 계절을 지나 마주한 시와 그림을 두고, 오래 설레며 기뻐한다. 만약 이들 만남에 서정적 음색이 필요하다면, 신지훈의 '목련 필 무렵'이 될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건너, '이제야 더 깊은 서로의 계절이 온 것'이라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오랜 망설임 끝에, 이제야 나는 목련을 주어로 불러낼 수 있을 듯하다. '목련이 나에게 말을 건다.' 이제는 그 목소리를 받아 적을 준비가 된 것이다.


신지훈, '목련 필 무렵'

https://www.youtube.com/watch?v=ynLY1mO81-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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