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는 왜 인간적이지 않았는가

by 이채이

나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황국신민학교(皇國臣民學校)’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아이들을 천황의 신민으로 길들이려는 음모가 농후한 이름이다.


해방 이후에도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초등학교(Primary School, Elementary School)’가 아닌 ‘국민학교’라는 독특한 이름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그 이름은 국가주의적 교육 기조와 권위주의 정권의 필요에 의해 50년간 더 유지되다가, 1996년에 ‘초등학교’로 개정되었다.


국민학교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은 복종의 대우로 학생들을 길들였다. 선생들 휘하에서 안전장치 없는 폭력이 난무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단체로 벌을 서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을 물건이나 동물 취급했던 현장의 굽이굽이를 기억한다.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의자를 들고 서는 벌은 끔찍하다. 벌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도 학급 전체가 연대책임을 감당해야 할 때가 많았고, 선생의 맘이 풀릴 때까지 고통을 감내하는 것만이 우리의 결백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학교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몽둥이가 등장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야구 빳따'라고 불렀다. 빳따를 맞는 아이는 주로 남자아이들이었는데, 싸움의 끝을 알리는 의식에는 늘 빳따가 제 의무를 다했다.


말은 폭력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는데, 체벌 전에는 늘 썩고 문들어진 야만의 말들이 패창처럼 아이들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무지의 말은 툭툭 붉은 피로 떨어졌다. 그나마 "문둥이, 멍청이, 돌대가리, 멍게, 해삼, 비료 포대..."등등의 말은 매우 고상한 축에 드는 말이다. 비인간적인 말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우리가 바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적처럼 느껴진다.


3학년 담임은 여자였는데, 숙제를 엄청 많이 내주었다. 당일 칠판에 쓴 내용 전부를 10번씩 따라서 써오라는 것이 보통의 숙제였다. 음악이라도 들라치면 악보에 음표까지 그려야 했으니, 잠자기 전까지 숙제해도 끝이 없었다. 숙제 검사 또한 철저해서 제대로 못 해 온 사람은 경중에 따라 심판받았다.


머리통 맞기부터 시작해서 엉덩이와 발바닥 맞기, 원산폭격, 변소 청소 등등. 그날 선생의 기분에 따라 체벌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숙제 안 한 사람이 많으면 아이 여럿을 하나의 커다란 나무 다발처럼 묶어서 무작위로 때렸다. 줄에 묶인 아이들이 이리저리 매질을 피하면서 소리 질렀다. 아이들은 한꺼번에 넘어지면서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 사이에서 소통 불가한 비명의 소리만 밖으로 퍼졌다. 묶이지 않은 아이들은 귀를 막고 책상에 엎드려서 울었다.


당시 국민학교 선생들의 가학적인 행위는 윗세대 교사들로부터 고스란히 전수된 것이다. 이 체벌문화는 청산되지 못한 일제 황국신민교육의 잔재였다. 식민 교육의 그림자들이 황국의 편에서 오래 기생했다. 나는 그런 교육의 중간 가해자 역할을 한 것이 당시의 교육계라고 생각한다. 친일의 논리에 포박된 채 우리의 교육은 헛된 거수경례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초등학교’가 있다. 우리를 매질하고 사물 취급하며 폭언의 극점에 있던 우리의 선생들은, 모두 교단을 퇴직하고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단지 특정 개인을 욕하려는 것이 아니다. 폭력을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하며, 아이들의 영혼이 짓밟히는 것을 방치했던 구조와 시대,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하며 침묵했던 사회 전체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과오가 아니라, 폭력이 폭력임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집단적 불감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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