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길을 추억하며

by 이채이

나는 은행나무의 노란 길을 좋아한다. 까만 아스팔트 위에 수북이 쌓인 은행잎을 밟으며 걸었다. 그 길은 아픈 나를 다독거리며 위로했던 기억으로 덮여 있다.


대학 시절, 나는 4년을 같은 집에 살았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길의 양쪽에 빽빽하게 숲을 이루었다. 창문을 열면 가로수와 그 사이를 물고 이어지는 2차선 도로의 완만한 내리막길이 한눈에 보였다. 방 한 칸에 좁다란 부엌을 달아낸 연탄보일러가 있는 초라한 방이었지만, 창밖의 풍경은 계절을 가득 품은 서정시처럼 조화로웠다.


봄은 새내기와 새순의 계절이다. 아침마다 연초록의 환대를 받으며 강의실로 향할 때면,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던 시인의 시가 떠올라 자주 읊조렸다. 나도 그처럼 초록의 뜰을 지나 노교수의 <현대 시론> 수업을 들으러 갔다.

현대 시론은 현대 시의 개념과 특성뿐만 아니라 시적 언어와 장치를 탐색하는 여정이었다. 은빛 머리칼의 교수는 말이 느렸지만 선명했고,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수업을 들으며 우리는 자주 웃었고 시를 사랑했다.


강의에서 배운 ‘삶의 눈’은 내 일상을 다르게 보게 했다. 대학노트를 끼고 아직 바람이 차가운 교정을 거닐며, 시상을 스케치했다. 하얀 건물 앞에 점점이 붉은 동백은 그저 스칠 수 없었고, 높이 솟은 히말라야시다 군락에서는 숨 쉬는 법을 다시 배우는 아이처럼, 호흡했다.

감은 눈을 뜨면 동경하던 숲의 바람은, 저 멀리 나무의 꼭대기에 걸린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거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가득 차 있으면서도 눈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그 허공의 움직임이, 나를 이리로 저리로 흔들었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숲의 벤치에 앉으면, 아침이 분주한 새들의 고단한 말을 엿들을 수 있다. 두어 마리로 시작된 건넌말은 여기저기 끼어든 말들로, 숲은 이내 새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눈을 뜨면 소리는 사라진다.

프림과 설탕이 고르게 섞인 자판기 커피는 달콤하고 향이 좋다. 그 향은 날개 달린 생명을, 오래된 봄날의 기억으로 불러 모은다. 퍼뜩 정신이 들면, 평등한 햇살 아래 제 걸음을 옮겨 시론을 들으러 갔다.


5월이 오면 교정은 젊음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대학원 건물 앞, 만개한 라일락은 주체할 수 없는 제 몸뚱이의 향을 사방에 뿌렸다. 세상의 곳곳을 알고 있는 부지런한 바람은, 라일락의 소망을 빈틈없이 전하며 속삭였다. 초록의 계절을 걷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설레고, 삶을 긍정하는 가치를 지녔다. 그래서였을까. 신록의 대학가에는 쉬이 사랑이 싹튼다.


봄밤의 캠퍼스. 사랑이 움트기에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가졌다. 밤의 공기는 건조하지 않고 차갑지 않다. 이 필요충분조건 아래 젊음들은 밤의 헤어짐과 아쉬움 앞에서 오래 키스했다.


만약 내가 누군가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마침내 나에게 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고요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나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고 없이 불쑥 찾아든 열병 같은 사랑 앞에서 나는 푹 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고 나의 심장은 자주 벌컥거렸다. 히말라야시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시집을 읽고 있을 때, 마음의 사랑이 웃음 지으며 곁에 와서 앉았다. 맑고 정직한 미소였다. 흰색 남방에 티를 받쳐 입은 청바지 차림. 곱슬머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맞춤한 것이어서 웨이브가 자연스럽고 단정했다.


우리의 관계는 팽팽한 설렘과 떨림의 긴장을 유지했다. 우리는 손을 잡았는데 그게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계절이 섞이고 시간이 뒤죽박죽 되어, 모든 기억이 제멋대로 굴러버린다. 하지만 또렷한 한 가지는 우리가 헤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아주 짧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헤어짐을 온몸으로 감지했을 때는, 은행잎이 금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황금의 길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이별의 슬픔도 화해를 시킬 만큼 거룩한 구석이 있었다. 은행잎이 수북한 길을 걷는 일은 고해성사의 힘이 있었다. 걸을수록 고통은 줄어들고, 영혼은 회복되어 차츰 상처가 아물었다.


가을비가 내리던 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겨울의 하늘을 떠올렸다. 곧 은행잎이 지고 나면 겨울이 온다. 나는 기대에 차서 짧고 매서운 찬바람을 기다린다.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멈춘 겨울나무처럼, 그저 바람이 세차게 나를 통과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이어질 나의 봄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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