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산을 곁에 끼고 걷다 보면 가까이 자작나무 군락을 만난다. 자작나무는 외로움을 타는 나무라서 제 홀로 있지 않다. 이는 식물학적 해석과는 다른 의견일지는 몰라도, 홀로 있는 자작나무를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리 추측해 본다. 자작의 서늘한 아름다움은 모든 잎이 소멸한 겨울에 가장 두드러진다. 하지만 여름의 자작나무는 기쁨에 차서 눈빛이 반짝이는 소녀 같은 구석이 있다.
자작나무 숲의 길과 설렘을 서정적으로 압축한 딱 하나의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이다. 나는 동화책도 즐겨 읽지만 만화 영화를 더 좋아해서, 앤의 만화영화 전편을 수도 없이 보았다. 이제는 온 가족들이 다음 장면의 대사를 외울 정도다.
고아였던 앤 셜리가 건강하고 눈부신 아이로 성장하는 과정을 자작나무 숲은 지켜보고 있었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도착한 앤이 가장 먼저 마음을 빼앗긴 것은, 사과나무 꽃이 만발한 '기쁨의 하얀 길'이었다. 그렇지만 일상의 기쁨과 슬픔의 서사를 함께하고, 성장을 공유한 것은 단연 자작나무 숲이었다고 믿는다.
햇살이 나무의 하얀 줄기를 비추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하고, 시와 이야기를 상상하다가 공상에 빠지고, 앤이 마음속으로 펼치는 순간들을, 자작나무는 온전히 다 받아주고 있었다.
친구 다이애나 배리와 함께 숲 속을 자작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고, 자지러지게 웃을 때, 잎사귀를 만지며 계절에 반응할 때, 나무에 몸을 기대어 심호흡할 때마다 나는 자작나무가 주는 기쁨은 결코 과장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자작나무의 낭만을 한층 깊게 느낀 계기는, 미국의 동화작가이자 삽화가인 타샤 튜더의 '카누'에서다. 타샤는 생전 버몬트 지역 30만 평의 숲에서 혼자 살았다. 19세기 스타일의 낡은 집을 짓고, 염소를 기르고 정원을 가꾸며 가끔 삽화를 그렸다. 거대한 숲 한구석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타샤는 그곳에 자신의 카누를 띄우고 논다. 카누를 타고 있으면 '원시의 기억이 자신을 살살 흔드는 것 같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카누는 여자 혼자서도 끌고 다닐 만큼 가벼운데 바로 자작나무 껍질을 재료로 만들기 때문이다. 배가 바구니만큼 가뿐하다고 하는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나무껍질을 타고 물 위를 떠다니는 상상을 하는 일은 나를 들뜨고 즐겁게 한다.
마치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가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나듯’ 말이다. 이 동요를 흥얼거리면, 나무껍질 배를 타고서, 바람이 흔들어주는 대로 수면 위를 떠다니는 동화 같은 기분이 든다. 카누에 누우면 비로소 하늘이 둥근 줄을 안다. 나무에 둘러싸인 연못에서 보는 하늘은, 새들의 움직임을 하나의 둥근 프레임에 잠시 가두었다가 놓아준다.
자작나무는 단순히 몽환적 아름다움만 주는 것이 아니다. 자작나무는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예전 산악 지형을 활용해 전술을 펼쳤던 우리 땅 빨치산들의 애환을 기억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은신해야 했던 그들은, 낮의 눈을 피해 한밤에 이동했다. 그들은 밤에도 눈에 잘 띄는 자작나무 숲을 이정표 삼아 밤과 밤을 이어 이동했다. 초여름이면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자작나무에 상처를 내고 수액을 받아 마시기도 했다. 산의 자작나무는 빨치산들의 지친 삶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을 숨겨주었고, 물을 내어주고 길잡이가 되었다.
산행 중 멀리 자작나무가 보이면, 설레고도 애잔하다. 초록 바람이 부는 숲 속의 아이를 마주칠 듯하고, 고요하게 일렁이는 나무껍질 위에 앉은 타샤를 만날 듯도 하다. 그리고 나는 당장이라도 북방의 숲으로 달려가서 자작나무 숲에 머물고 싶어진다. 이념과 신념의 경계를 벗어던지고 오롯이 새잎이 주는 기쁨의 함성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