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by 이채이

새벽에 창을 열고 북쪽 하늘을 보았다. 먼 하늘에는 아직 어둠이 들어차 있고 여명은 땅에 먼저 내리고 있었다. 인간이 주조한 빛을 따라 길이 달리고, 그 길을 따라 바람도 찾아온다. 오늘의 바람은 어제의 것과는 술어의 느낌이 달랐다. 툭 트인 공간 속에서 서늘했다. 창을 통해 방안까지 들어온 서늘함은 읽던 책을 느슨하게 만지고 넘기며 염탐했다. 펼쳐진 책들은 간지럼을 타고 '풋'하고 한 음절로 웃었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의심할 여지없는 판단은 늦더위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단호하다. 뙤약볕의 방해 없이 뚜벅뚜벅 걸어서 제빛을 손에 쥐고 계절이 온다. 새로운 계절에는 늙음이 없다. 백세의 여인이 백 번의 계절을 맞았더라도 이제 오는 가을은 또 새 가을이다. 그녀의 외계에 스미는 세상의 변화와, 내면에 들어찬 기대는 적절히 조화하며 섞일 것이다.


책을 읽다가 침대에 가만 기대 누우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둥글게 떠오른다. 뱅그르 바람을 잡아타고 하늘로 떠오르는 비닐봉지처럼 부드럽게 연음 되어 난다. 바람의 결을 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서 흘러간다. 헤벌어진 비닐은 높이 떠올라 버린다. 공허하고 높은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여름의 뜨겁고 둔탁한 공기를 밀어내고 천고의 끝으로 말고삐를 잡은 채 달리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은 가을을 데리고 온 바람의 묘기다.


주전자에 물을 받고 볶은 결명자 몇 알을 넣어 끓인다. 부글거리는 알맹이가 진정되면 물은 다갈색으로 붉어지는데, 몸을 뜨겁게 하고 눈의 열을 내린다. 그러면 읽던 책을 덮어두고 글이 쓰고 싶어진다.


다정한 말투의 사람이 생각나고 단호하게 쌀쌀맞던 이들도 떠오른다. 이런 날 나는 그들과 함께한 시간 안에서 척박한 말만을 골라내서 나의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곱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거칠고 황폐해서 버려지는 것들을 쓸어 모으고 싶다.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절망의 언어를 가지런하게 그러모을 수 있을 것 같다. 메마른 말들이 더러는 나를 향해 덤벼들 테지. 그래도 가을의 문턱에서는 그 말의 대거리에 지치지 않는다. 우리에겐 낯선 시간이 오고 있다는 설렘 때문이다.


하늘이 높아지면 떠나고 싶은 열병이 난다. 봄이 빛을 찾아 떠도는 것이라면 가을은 냄새의 자취를 쫓아가는 것 같다. 가을의 향으로는 아침에 마시는 커피를 최고로 여긴다. 그 향기가 파고드는 철저함 때문이다. 꽃향기가 무성한 봄여름을 지나, 그저 텅 빈 공백으로 잠시 머무는 시간의 커피는, 뇌 속에 깊이 박혀서 고독이라는 이름을 데리고 온다. 순간 지난 계절 잊고 지낸 내 존재를 고독으로 끌어낸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고독에 대한 욕구는 인간 속에 정신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고독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무리를 떠난 새처럼 이내 죽어버린다고도 했다.


고독이란 사랑처럼 자연스러운 바람이다. 고소한 향을 머금은 잔을 손으로 감싸고 있으면, 내 안에 들끓던 언어들이 출렁임을 멈추고 잠잠해진다. 정신이 맑아지고 자연의 질서가 내 전 생애를 휘감고 제 몸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하여 세월의 두루마리를 한 겹 더 두르게 되었다.


예측할 수 없던 어제의 비바람은 가는 여름이 내쉬는 한숨 같은 것이었다고 믿는다. 그에게도 운명이 있다면 이제는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무수히 형용하고 빽빽하게 써 내려간 무더운 이야기를 마치고, 이제 가을에 맞는 향과 깊이로 그윽하게 빛나는 고요한 밤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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