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와 친근해진 어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글을 쓰다'와 '기억하다'가 친족 관계의 언어임을 안다. 나는 두 단어의 핵심을 파고들어 그 안에서 유영하기를 즐기고 있다. 때때로 이 두 단어가 가진 은밀한 교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행위의 심연에는 내 삶을 지탱했고 자극했던 소소한 것들의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애초부터 인과의 의미로 결합된 말들이 있다고 한다면 '기억'과 '쓰기'일 것이다. 이 둘은 순서를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같은 자궁에서 오래 교류하며 함께 둥글어진 그런 말이 있다. 근원이 같으나 모양새를 달리하고 나타난 이란성쌍생아 같은 친연성의 말 말이다.
'남기다'는 기억하고 글을 쓰는 행위의 끝에 수행되는 자동 저장 기능과 같다. 글은 종이에 흔적을 남기고, 기억은 마음에 흔적을 새긴다. '기억과 쓰다'를 깔때기에 부으면 이 둘은 혼합되고 섞이면서 자음과 모음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이 반응은 또 다른 서술어로 변주되는데, 그것이 '남기다'이다. 기억을 남기고 글을 남기듯이.
글이 생각이나 경험을 보존해서 되읽게 하듯, 기억 또한 간직하던 감정과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둘은 독립적이지 않고 동시다발적이어서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사람이 가지는 감정의 폭은 언어로 새겨질 때 비로소 명확해진다. 나는 기억 속에서 꺼낸 것들을 감촉할 수 있으며 시간을 소환하고 거슬러 느낄 수 있다. 이는 인위성이 불필요하다.
나는 오해했던 많은 것들을 불러들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기억하다'이다. 겹겹이 쌓인 주름을 들춰보면 내 맘대로 구겨 넣어 버린 진실이 이제야 깨어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깨어나는 순간의 진실을 두고 나는 부끄러움이라는 원초적 감정 뒤로 숨는다. 골목에서 싸움 소리가 나고 여자가 울고 있으면, 길바닥에 흩어진 대학 노트를 주워주고 싶다. 들어선 길목마다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장들이 뒹굴고 있다. 여자가 뱉어낸 말과 남자가 주워 담지 못한 온갖 사랑했던 순간들이 초라한 이별의 언어로 버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감정 뒤에 숨어 찾아낸 것들이다.
내팽개치고 귀 막아 버린 순간들은 쓰다 버린 종잇조각처럼 구겨진 채 버려졌다. 우겨진 종이를 주워서 펴 본다. 내가 꿈꾸었던 비현실적인 것들이 과거의 시간을 벗어나 오래전 현실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털고 고단한 표정으로 걸어 나온다. 그 표정은 거울과 같아서 말로 말할 필요가 없고,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이제는 모래 바람이 잠잠해졌다.
잠잠해진 바람 속에서 기억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꽉 들어찬 그 안에 사라져 버린 괴목(怪木)이 있다. 내가 살던 마을 어귀에 기억을 먹는 신비의 나무 말이다. 그 아래서 했던 온갖 생각은 괴목이 모조리 빨아들여 품고 있다. 어느 순간 사라진 나무처럼 싹둑 나의 과거도 잘렸다. 잘린 괴목을 떠올리는 순간 오래 잠복하던 기억들이 강의 빗방울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긴 수형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자유를 찾은 기억들이, 닳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을 꺼내준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기억하다'에 의존하고, 그 자취를 더듬어 쓰고 남긴다.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나를 가득 채우던 푸릇한 식물의 이야기, 색상환 표를 가득 채운 오묘한 빛깔들, 밋밋한 삶에 온기와 생기를 끌어다 준 사람들, 그들과 함께 보냈던 수없이 비껴간 계절들. 이런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내 안에 꽉 들어차 있다.
내가 쓰고 싶은 문장은 그리움이나 아픔과 사랑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수렴된다. 이들의 몸체는 생생한 기억과 은유로 채워져서 그것이 먼 데 있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한다. 마음속에 기억해 둔 것은 내면의 기록 같은 것이어서 오래전에 내가 써둔 초고 같은 것이었다. 마음을 빌어 기억하고 언어를 빌려서 쓴다. 그리고 심장에 남긴다. 괴목 속에서 깨어난 것들은 살금살금 우주 공간으로 떠나간다.
작가는 우주의 시간에 거대한 그물을 걸어 별을 건지는 사람이다. 그 그물로 하나씩 별을 헤아릴 때, 거대한 족대에 걸린 것처럼 마음속 기억도 함께 딸려 나온다. 내 안에 녹아드는 빛의 기억을 쓰고 남기는 이. 그가 바로 글 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