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by 이채이

"그대의 길은 멀고, 나의 사랑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국의 바닷가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바다를 물들인 석양의 배 위에, 그 남자도 서 있었다. 오랜 항해에 지친 남자가 춘풍을 맞고 토악거렸다. 물결은 잔잔했지만 여자의 마음은 심하게 출렁거렸다. 여자는 달려가서 남자를 품에 안아 눕혔다. 남자에게서 은은한 향내가 났고 파르르 깎은 머리가 검푸르게 자라 있었다.


남자에게 연정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글을 읽으면 이내 밤이 깊어졌다.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남자와 제 것 모두를 버릴 수 있는 여자의 공허한 바라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시선은 늘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속세의 아름다운 것에 정을 두지 않았다. 여자는 돌덩이를 마음에 달아 무겁고 아파서 초조했다. 그에게도, 눈이 내리고 매번 또 가을이 왔다.


그가 잠시 방을 비우면, 가지런히 책을 정리하고 들창을 열어 가을을 불러들였다. 먹을 갈아두고 이부자리를 폈다. 그녀는 그의 베개에 살포시 뺨을 대고, 겨우 숨 쉬었다. 손끝이 이부자리를 스칠 때마다, 그의 체취가 코끝을 어지럽혀 붉게 달아올랐다. 맘을 할퀴듯 잠시 그녀는 제 몸을 소유했다. 부푼 젖가슴을 안고 울었다.


그는 시를 쓰지 않았고, 그녀는 시를 읽지 못했다. 그를 향한 늦봄의 관능과 가을밤의 욕정이 다르지 않았다. 불빛이 그려주는 그의 그림자는 문살을 뭉개고 기어이 반듯했다.


흔들리며 봄이 오고 겨울이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7년이었다. 연모의 맘은 그녀 안에 두텁게 쌓였다.


그의 방안 불이 꺼졌다. 그는 그녀를 오래 안아주었다. 몸이 풀어지고 귓볼과 입술이 녹아내렸다. 여자의 몸 가득 질펀한 봄꽃이 피어났다. 무성한 체모처럼 봄이 가득 올랐다.


맑은 아침, 기쁨에 들뜬 여자가 그의 방문에 다가갔다. 신발 대신 놓인 댓돌 위의 목련 한 가지가, 희었다.

여자는 돛을 밀어주는 바람을 느꼈다. 항구로 달려간 그녀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흔적만 남은 남자의 체취가 멀어지고 있었다. 딱 한 번이었다. 배꼬리에서 퍼지는 파도는 지나간 뱃길을 지워버렸다. 바다를 바라보며 여자는 울었고, 웃었다.


풍덩 소리와 함께 바다가 입을 열어 짧은 파열음을 냈다. 울음을 삼킨 웃음이 길게 일렁거렸다.


고향에 돌아온 남자는 먼 이국의 소식을 들었다.

꽃가지를 손에 든 여자가 바다에 빠졌다고도 했고, 물에서 건져낸 여자에게 꽃향기가 났다고도 했다.

* 신라시대, 당의 산둥에서 유학하던 의상을 사랑했던 여자. 죽음으로 존재를 증명한 선묘, 그 여자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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