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으로

by 이채이

숲은 동안거를 준비 중이다. 풍경소리가 멀리 퍼지는 암자의 시봉 스님은 마당을 쓴다. 늦가을이면 쏟아지던 속세의 마음이 사각사각 빗자루 끝에 모이고, 부젓가락으로 뒤적거리던 아픔들은 재가 되었다.


속이 덜 찬 배추를 뽑아 된장국을 끓인다. 쪽파를 먹던 벌레가 더 깊은 속살로 파고든다. 쪽파 한 줄기를 똑 떼어, 바람 길에 올려둔다. 삶은 통과되어 흐른다.


산을 가르는 골짜기는 굵은 바위를 씻고 있다. 도르르, 똑똑 흐르던 물이 돌확을 가득 채운다. 그 느림이 좋아서 찰칵 소리를 내면 순간은 영구히 보존된다. 직박구리가 날아와 물을 마시고 낙엽이 느긋하게 몸을 담그는 아침이다.


반짝 비쳐 든 햇살에 눈을 감았다. 따뜻한 빛이 대롱이는 홍시에 집결했다. 햇볕의 온기로 떨떠름한 속내를 누그러뜨린다. 까끌한 세상에 두고 온 단맛이, 이제는 덤덤해졌다. 붉어가는 홍시를 보며 웃는다. 쓰디쓴 세상에 던지는 화두, 나의 상념이 익어간다.


이제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눈물 고이는 나이가 되었다. 길을 잃으면 밤이 더 무섭다. 들에서 거둬들인 향내를 꺼내 먹으며, 삭정이 같은 발을 주무른다.

올빼미 소리에도 덜컥 겁이 나면, 웅크린 내 안의 아이를 토닥이며 속삭인다.

'아가, 이제는 집에 가자.'


말라가는 세상의 것들이 나를 비웃는다. 사람의 길을 따라 걷지 않는 고라니처럼, 젊은 나는 평온한 것의 음지에서 흔적 없이 고립되었다. 삶은 가볍고, 무게가 없었다.

몸에 묻혀온 들것의 냄새는 나를 숨 쉬게 했다. 인가를 얼씬하지 않고 여린 잎을 먹으며 버티던 유순한 날들. 상실과 고독 같은 값없는 것들만 손에 남았다. 스님이 쓸어내는 낙엽에 섞여, 활활 타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다. 미치게 달아오르던 번뇌가 첫서리에 가만히 식어감을 느꼈다. 겨울이 문턱까지 와 있었다.


세상 공부에 지친 이들이, 느리게 겨울로 모여든다. 홍시 같은 늦가을을 손에 쥐고, 나는 걸어서 간다. 조용히 동안거에 든다. 숨을 고르고, 품속의 경전을 펼친다. 머물던 것들은 머물다 가고, 사라질 것들은 고요히 흩어지길 기도한다.

목탁 소리가 먼 산을 건너오고, 젊은 스님의 목어가 밤하늘을 헤엄친다. 내 마음이 목어를 따라간다.


무릎과 손바닥 안에 마음이 모인다. 정적이 숨을 고를 때, 어둠 속에서 한마디가 걸어 나온다.


“파계하였느냐.”


불경을 넘기던 그의 손등이 미세하게 떨린다. 스친 체온이 아직 밤을 기억하고 있다.


부끄러운 침묵이 나를 산문 밖으로 밀어낸다. 뒤돌아본다.

스님은 마당을 쓸고 있다. 쓸려나간 것은 잎이 아니었다. 나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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