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길이 갇혔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밤이 주저앉아버렸다. 밤과 밤을 이어주던 마을버스는 길에 파묻혀 전진 불가하다. 얼어붙은 길은 사람의 발걸음을 거부한 채 완강했다.
그날 밤이었을 것이다. 유리창마다 말간 서리가 얼어붙은 것이. 지워도 끈적하게 들러붙는 기억처럼 집요하게 세상에 쌓이는 중이었다. 목화 같은 송이눈이 세상 소음을 닦아냈다. 가까이 끌어당겨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화실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었고, 닫힌 철문을 더욱 거칠게 쳤다. 철문의 녹슨 가루가 눈 위로 떨어져 거칠게 흩어졌다.
여자의 외침에는 대답이 없었고, 쇳가루의 낙하에는 지향점이 없었다. 완고한 다짐처럼 닫힌 문은, 두드림의 진동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남자의 벽은 녹슨 쇠냄새를 풍겼다. 부식한 쇠의 거친 부스러기가 여자의 쉰 목소리처럼 바스라 졌다.
덜컹하며 문이 열렸다. 퀭해진 남자의 눈이 핏발 선 시간을 말해 주었다. 남자는 비틀거리고 헝클어진 채 걷는다. 바닥이 닳은 슬리퍼가 느리게 끌리면서 걸었다. 앞서 걷는 남자의 뒷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다. 오목렌즈 안에 갇힌 먼 그림자처럼.
화실 안에는 솔잎과 송진향이 머물러있다. 메케한 테레빈유 냄새가 떠돌았다. 그리다 만 캔버스에 진득한 고독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기름에 담긴 붓은 어둠 속에 스며들어 색을 녹이고 있었다.
그림 속의 여자는 목련 아래 서 있었다. 표정이 없는 그녀에게 그는 미소를 얹어 주지 못했다.
화실 안에서 목덜미가 시리고 코가 얼었다. 불 꺼진 난롯가에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추웠고 손이 곱아졌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찬 한기에 몸을 떨었다. 남자는 전기 주전자를 딸깍하고 눌러 물을 끓였다. 남자의 파랗던 몸이 주전자의 열기에 옅어지고 있었다.
"이건 커피 꽃을 말린 거야. 꽃을 차로 마신다는 게 낭만적이지 않아?"
그녀가 애써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남자의 침묵이 멋쩍어서 여자는 창을 열고 머그잔 가득 눈을 담았다. 눈 위로 뜨거워진 물을 부었다. 말린 꽃 두어 잎을 떨어뜨렸다. 입술처럼 메마른 꽃잎이 눈을 녹이며 핑그르 돌았다. 여자의 눈에도 핑그르 가득 눈물이 고였다.
눈을 감은 남자의 침묵은 적막했다. 팔짱을 낀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차갑게 얼어붙은 파도의 조각 같았다. 다가오지 않고 밀려난 채 굳어버린 석고 같다.
쓸쓸히 가라앉은 묵직한 것들이 지난 시간을 조곤히 상상케 해주었다. 더 이상 서로를 후벼 파지 않고 이대로 덮고자 하는 남자의 결심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마지막을 예감하는 여자의 표정이 밝아서 아렸다. 감싸고 있던 컵이 식었기에 여자는 말없이 일어섰다. 컵을 싱크에 넣고 물을 틀었다. 수도가 얼어 물이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이것이 관계의 마침표임을 알았다. 누군가 그 마무리 점을 찍어야 한다면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덜컹 또다시 철문이 닫혔다.
어스름 설경 속으로 여자가 걷고 있다. 미안하다. 용서해라. 남자는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다. 지나간 발자국 위로 하늘의 것이 떨어지고 여자의 터벅한 걸음이 뒤따라갔다. 눈송이가 크고 예뻐서 여자는 웃었고, 눈을 맞은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밤사이 도시는 낯설어졌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진 가시나무가 하앴다. 여자의 말은 남자의 침묵에 닿지 못했고 손끝의 감촉은 동상처럼 굳었다.
‘하나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찻집 간판 앞에 여자는 멈추었다.
찻집 문밖에 밤을 걸어온 여자가 서 있었다.
노(老) 시인의 글귀를 입속에서 버무렸다. 봄이 되면, 하나의 나뭇잎이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루는, 무진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쯤이면...
찻집 정원엔 붉은 열매 한 알이 눈 속에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