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색을 빼고 있다. 젊음의 빛을 서서히 녹여내고 있다. 단풍이 붉어지고, 댑싸리가 물들어 가는 것은 배워서 얻는 성적표가 아니었다. 스스로 붉어지고, 끝내 푸름을 간직하려는 일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맨발로 땅의 온도를 재는 야생화는 보살핌 없이 홀로 만개했다.
머리카락을 붉게 염색하고 싶다면, 먼저 가닥마다 스민 진갈색을 빼내야 한다. 그제야 새로운 색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상념을 내다 버리지 못해, 아직 가을로 물들지 못한다.
삶이 뭔지 몰라 아직도 시의 언저리를 맴돈다. 나는 한 줄의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수국의 마른 꽃을 잘랐다. 수국의 둥글고도 풍성한 자태는 화려하고도 처연하다. 아름다움은 불임으로 몸부림친다. 우물가에서 정성을 들이는 무녀의 기도처럼, 지극하고 절절하다. 수국은 올해도 회임하지 못했다.
이팝이 피는 봄이면 나는 겨우 배가 부르다. 가마솥뚜껑을 열 때 밥김이 사방에 퍼지는 것처럼, 온 세상이 흰빛으로 뿌옇다. 가지마다 흰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나르고 있다. 이팝 꽃이 바람에 나부끼면, 온 마을의 허기가 잠시 가시고 배부른 잠을 잘 수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쌀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백일홍이 피어나면 온 여름이 들썩인다. 피어나기로 작정한 마음은 가지 끝부터 꽃물이 올라, 가을의 끝자락까지 붉다. 나도 그처럼 오래 붉고 싶은 소망을 가만 품어본다.
꽃무의 셔츠를 잘라서 긴 줄을 만든다. 안젤라 부케를 한 줄기를 꺾어 살며시 셔츠의 끈으로 묶는다. 리본은 길게 늘어지고, 분홍 분홍한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이런 날에는 한라산에서 말린 설록을 한 잔 마시고 싶다. 여린 연두가 뜨거운 티팟에서 풀어질 때면, 초록이 만발한 비밀의 정원에 선 기분이 든다. 이 어울림은 억지가 아니라 제법 자연스러워서 맘에 든다. 나는 이 조화로운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어, 굳이 당신께 전화를 건다.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내민 고욤 가지에서, 바람 한 줌이 툭 떨어졌다. 저 작은 열매마다 여름 햇빛에 익어가던 기억과 달빛을 온전히 받던 순간이 숨 막히게 매달려 있다. 나는 달빛 정원의 차를 꺼내 은은하게 우린다. 우리가 나누는 소곤소곤한 말들이 메마른 찻잎을 깨워 기지개를 켜게 한다.
당신을 배웅하며 저문 계절이 내려앉은 낙엽을 떠올렸다. 제 초록을 끝내 빼내 버린 뒤에야, 스펀지처럼 계절을 빨아들인 잎들을 생각했다.
나는 나로 가득해서, 당신으로 물들 수 없었나 보다.
이 밤, 당신은 당신을 내려놓고, 나는 나를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당신으로 물들 수 있었고, 당신은 내게 젖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오래 깨어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