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석류

by 이채이

석류꽃이 진다.

석류꽃은 사랑받지 못했고, 사랑받은 척도 하지 않는다.


송화가 뒤덮는 밤, 그 밤에 석류꽃 같은 여자는 사랑을 새긴다.

남자의 정념이 여자의 깊숙한 곳까지 침범하였다.

꽃가루는 밤새 가득했다. 여러 날을 흔들렸고 깊이 고였다.


석류꽃을 보면 자식 못 낳는 집에, 자식을 낳아주러 들어간 여자 같아 아프다.

가문의 씨를 받아주러 들어간 여자의 일생 같아서 힘겹다.


여자는 간밤에 다녀간 남자의 속엣살이 그리워서, 도톰한 입술을 내밀고 있다.

꽃이 지고 나면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다.

무심의 시간을 저어서 여자는 배를 부풀린다. 손을 빌며 아슬한 날들을 채운다.


석류가 새콤하게 익어 먹고 싶다. 여자가 석류를 한 움큼 입에 넣고 입술을 붉게 물들인다.

생리가 멎은 여자의 배는 말 없는 계절처럼 홀연히 불러온다.

바가지 만 한 배를 만지며 여자는 설컹, 속이 빈 웃음을 흘린다.


석류가 익어간다. 가득 차오른 배를 안고 여자는 제 홀로 산통을 겪는다.

여자는 안다. 아이는 두고 저 홀로 집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새겨둔다. 자신은 사랑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저 홀로 버려진다는 것을.


퍼뜩 정신이 든 여자는 잔치 준비로 술렁이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를 데려갈 테고, 남자는 딴 여자의 밤에 이미 녹아버렸다.

여자는 배를 쓰다듬고 쓰다듬는다. 제 안에서 용케도 부푼 이것을 어찌할까.

어둠은 외마디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출산의 밤이 다가온다.

살아 있는 것이 보내는 신호는 강렬하여, 여자는 주체 못 할 고통에 울었다.

밤의 달이 창백하다. 서까래에 묶여 출산을 도와줄 해산줄이 희다.

여자는 질긴 무명의 줄을 겨우 쥔다. 공기는 아려, 숨조차 조인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여자는 울며 배를 다독인다.


감나무 가에 해산줄을 묶고, 달의 산파를 불러낸다.

여자는 몸을 묶고 배를 내밀어 아이를 낳는다.

여자는 해산줄을 움켜쥐었다 놓으며 마지막 숨을 모았다.

그리고 단도를 천천히 배에 가져다 대었다.

피가 꽃처럼 흩날렸다.


여자를 산줄에서 내렸을 때 터진 석류처럼 여자의 배가 벌어졌다.

다 여문 생명이 그 안에서 붉은 피를 쏟아 놓았다.

마침내

석류 한 알이 떨어졌다.


석류꽃이 피었다 진다.

사랑했던 기억이 바람 속을 떠돈다.



* 사진은 '베리초보남 영주'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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