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떠나간다. 붙잡으려는 손길을 힐끗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얄짤없이 가버린다. 가을이 멀어지면 마음도 함께 힘겨워진다. 마음이 허전해 글이 흐트러진 날, 시인의 집에 찾아간다. 시인의 마당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다. 마당을 쓸던 은행나무가 문을 열어주었다. 집 단장을 했는지, 예전에 없던 강돌을 마당 가득 심어두었다. 처음 보는 돌들은 걸을 때마다 말을 걸어와 전진을 방해했다.
시인은 커다란 바위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옴막해진 발바닥으로 돌을 딛고 걷는다. 발바닥이 간지럽다며 웃는다.
- 오늘은 글이 안 써져요. 쓰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런 날은 어떡하죠?
시인은 말하지 않았다.
'꽃이 우아하고 예쁘더라' 모과차 한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김이 오르고 온기를 따라 향그런 것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 요즘 글이 안 써져서 입 안이 까끌거려요. 입맛도 없고요.
시인은 옛 가수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 노래는 떠나버린 사랑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했다.
마지막이라는 가삿말이 들렸고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도 했다.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는 그리움을 문득 만나게 되었다. 그리움은 누군가의 노래 가사나 음표 속에 숨어서 고요하게 울렸다. 순간 서서히 마음을 채워주던 날들이 마음에 가득해졌다.
나는 '주었다'는 말을 생각했다. 시인은 항상 나에게 무언가를 준다.
주었다는 주다의 추억형이다.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된다.
내가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대문을 열어주었다. 우울해 보이는 날이면, 내게 시를 읽어 주었다. 시인은 가을을 나박나박하게 썰어서 담근 모과차를 내주었다. 기분이 더없이 건조한 날에는 이슬비 같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는 말없이 위로해 주었다.
나는 '주다'와 '주었다'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이기적으로 생각하자면 '주었다'의 기억은, 준 적 없는 내가 온전히 받기만 하는 말이었다. 내 안에서 저 혼자 따스하게 번지는 말이다.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날, 살아갈 힘이 되는 말이었다.
시인은 오늘도 나에게 스스로를 견디는 힘을 주었다. 그건 오래된 노래로, 마당의 강돌로, 대문을 밀고 나오는 미소에 묻어 있다. 시인 곁에 가만있어도 위로가 된다. 그런 날이 있다.
- 모과차 한 잔 더 주세요.
그에게 모과의 향기가 그윽함을 칭찬해 주었다. 오래 우려낸 당신의 마음 같다고 전해 주었다.
오늘은 나도 그에게 줄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