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보다 더 추운 파랑 속으로

by 이채이

감정은 주변을 금세 물들인다.

당신은 마음의 색상표에서 색을 고르느라 고심하고 있다. 사랑에게 바치고 싶은 어여쁜 꽃을 고르듯 섬세하게 고민하고 있다. 물감을 짜 둔 팔레트를 볼 때, 얼마 남지 않은 물감의 칸이 움푹 패어 있을 때, 나는 미소 짓는다. 당신이 불쑥 나의 계절로 들어와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노란 물감으로 그린 당신의 가을은 하늘까지 번져 갈색의 그라데이션이 되었다.


사랑의 마음을 그릴 때, 젊음은 여지없이 핑크색을 뽑는다. 흰색 베이스에 빨강을 아주 조금 찍어 섞으면 도화의 핑크가 되고, 물을 조금 더 넣으면 벚꽃의 연한 핑크가 된다. 이 벚꽃의 색들은 남풍을 따라 북향 하며 분분히 물들어 간다.

사랑의 시작은 흰색 순결에 붉은 마음을 조금 넣어서 물들인다. 이 분홍들은 설렘으로 만개해서 사랑의 '첫'을 찍어 낸다. 여린 꽃만으로 첫 마음을 온통 흔들어 댄다.


부끄러움은 대책 없이 빨갛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전류가 스치면 잠시 심장이 멎고, 그 떨림이 다시 붉은 파동으로 돌아온다.

전류는 분명 빨강일 거라고, 당황한 심장이 돌아와 다시 울컥거리며 말했다.

사랑은 저릿한 경련의 통증을 준다. 통증은 신경을 찌르고 마침내 아픔도 흡수한다.

사랑을 붉게 칠하는 까닭은 심장을 통과하는 피의 붉음 때문이라는데, 당신 앞에 선 나는 마냥 얼굴이 빨개진다.


오래전 가을로 떠난 당신에게 전할 물감을 고른다. 늦가을의 낙엽이 쌓여 땅의 온기를 유지시키듯, 당신의 마음을 보온할 진한 고동색 보내기로 한다. 당신의 열을 식혀줄 산수유도 가득 넣어 부쳤다. 그사이 나도 잠시 침착해졌다.

핑크나 초록은 잠시 비켜두자. 아껴두었다 꺼내 먹는 달콤한 쿠키처럼, 이어서 올봄을 위해 잠시 두자.


이른 아침,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우체부가 돌아왔다.

당신은 이미 겨울로 떠났음을 알렸다. 바다의 물결 소인이 찍힌 소포만 남겼다고 했다.


"나의 가을은 온전했다."

단 한 줄의 엽서는 헛헛했다. 그 온전이라는 말속에서 당신이 겪었을 온갖 가을의 형용사를 떠올렸다. 당신이 차곡차곡 쌓아 두었을 갖가지 형용어는 '온전'이라는 말로 갈음되었다. 그 안의 것을 상상하느라 나의 한나절이 저문다.


남쪽 바다로 간 당신은, 겨울보다 더 추운 파랑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바다의 깊이를 재듯 매일을 지샐 당신을 떠올리며, 나는 연두와 하양을 섞어 벙어리장갑을 뜬다. 봄이 올 즈음 만나게 될 새싹과 꼭 맞는, 그 연두다.


당신 안에서 나를 찾는 일은, 내 안에서 당신을 찾는 일보다 늘 더디다.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간’이라는 거리가, 그리움의 색을 한층 더 짙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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