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은 육신에 갇혀있다. 고통은 뿌리가 없어서 몸을 타고 흐르다가 머문다. 내가 몸의 고통을 직시할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이 오직 나의 몸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고통 없는 나’ ‘고통 없는 몸’이란 말은 모순이다. 인간의 고통은 모두 육신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의 몸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통을 없애 달라는 말은, 어쩌면 고통을 인식하는 ‘나’ 자체를 없애 달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곧 나의 파괴, 나의 상실을 의미한다.
긴 쇠꼬챙이가 있다. 그것을 고통이 머문 자리에 찔러 넣는다. 상처를 터뜨리면 고통이 분출된다. 그 날카로운 끝을 온전히 인식하는 순간, 육신은 마비된다. 그러나 고통마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 마비는 천천히 풀린다.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고통은 깊이의 상대성을 지닌다. 얕은 상처에도 무너지는 이가 있고, 깊은 상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가 있다. 고통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그것이 곧 생명 현상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면, 그 자체가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마음의 고통 역시 육신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저절로 만들어지는 듯하다. 글을 쓰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 글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종종 번뇌를 일으킨다. 설령 내 글이 ‘쓰레기’처럼 태어났더라도, 그 안에서 단 한 줄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면 된 것이다. 그것은 인고의 시간을 견딘 내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시간을 진실하게 견뎌냈는가이다.
고요히 앉아 나를 바라볼 수 있다면, 가능하다. 나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불행. 파스칼의 말은 고요한 수면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과 같은 파장을 일으켰다.
"인간의 불행은 고요한 방에서 홀로 앉아있지 못하는 데서 시작한다."
조용한 방에서, 홀로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고통의 근원과 생의 덧없음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