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밖은 캄캄하다. 7시가 넘었지만 아직 어둑하다. 한 번 찾아온 밤은 눌러앉아, 쉬이 일어서지 않는다. 아직 빛이 스미지 않아서 고요가 지속되어 마음이 차분하다.
해를 맞이하러 바닷가와 산의 능선, 사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일출은 아직 멀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에게도,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자아는 쉼 없이 말을 건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깊숙이 찔러 넣은, ‘다짐’이라는 이름의 말이다.
존재하지만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다짐처럼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말. ‘어른’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칸트에게 어른은 스스로의 판단을 감당하는 사람이었고, 사르트르에게 어른은 자신의 선택에 끝까지 책임지는 존재였다. 서양에서 어른은 대체로 ‘자기’라는 문제를 중심에 두고 사유되어 왔다.
어디선가 “어른이 된 사람은 있을 수 없고, 다만 부단히 되어가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된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말에 마음이 기운다. 그 문장을 떠올리면, 세상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듯하다.
‘부단히 되어간다’라는 말은 이상하리만큼 단단해서, 왠지 모를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가 식어가는 ‘어른’이라는 낱말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주변에 어른이 없다는 감각은 살아오며 점점 더 확고해졌다. ‘어른인 척’의 가면을 벗기면, 대개는 불안한 민낯이 드러난다.
그래서 내가 떠올리는 어른은, 사유하는 개별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넘어설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이라는 글자 아래를 받치고 있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려면, ‘ㄹ과 ㅁ’ 같은 단단한 벽돌이 필요하다고. 그 벽돌을 만들어온 사람들은 밑바닥의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삶을 한 장씩 고여주었다.
삶이라는 글자의 받침이 만약 둥근 ‘ㅇ과 ㅎ’이었다면, 삶은 늘 구르듯 흔들렸을 것이다. 모서리 없는 글자는 붙잡을 곳도 기대 설 자리도 없다. 그래서 삶에는 ‘ㄹ과 ㅁ’ 같은 평평한 굄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밀어 올리며, 아래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어른’이란 목적지에 도착한 이름이 아니다. 완성형의 호칭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 자신을 내어주는 말이다. 끝내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태도다.
*사진은 '박에너지'님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