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by 이채이

새벽 서리가 은빛이었습니다. 서리는 밤의 냉기를 버티다 끝내 얼어붙었고, 담을 넘는 남자의 손자국을 눈감아 주었습니다. 눈이 내리지 않아 손자국을 덮지 못했고, 기왓장마다 찍힌 족적은 은비늘처럼 새어 나와 굳었습니다.

고양이도 운신하지 않는 추운 날이었습니다.


남자는 그저 여자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구걸로 보이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여자의 눈에 남자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남자는 사랑이 끝내 자기 자신을 불태울 수도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골목의 기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반지하의 불빛을 드나들며 그들은 사랑했던 사이였습니다. 뜨거움은 오래 머무는 법이 없었고, 여자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이별을 향해 움직였고, 남자는 여자에게 머물렀습니다. 여자는 또 다른 사랑을 위한 이별에 희망을 걸었고, 남자는 그저 여자에게 희망을 걸었을 뿐입니다. 밝은 달빛 아래 밤드리 노니던 처용이 담을 넘어 여자에게 갔을 때, 여자의 이불속에 가랑이가 넷인 걸 보고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노래할 수 없었습니다. 내 것 아닌 가랑이가 내 것의 가랑이에 파고들어 엉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떨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듣지 않으려고 보지 않으려고 움츠렸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호랑가시가 돋아났습니다. 여자는 사랑할 때 늘 가면을 씁니다. 눈을 감고 온몸으로 느낍니다. 남자는 네 개의 가랑이가 나누는 대화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녀와 줄곧 나누던 기억의 그러나 요사이 뜸해진 그런 대화였습니다. 이불속 둘의 대화는 파열음과 신음이 섞인 격렬한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김이 서려 창문 안은 희미해 보였습니다.


거구의 가랑이가 여자의 작은 가랑이 사이에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회오리 속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불의 구덩이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거구의 가랑이는 여자의 두 가랑이를 끌어와서 깊이 찔러 넣었습니다.

눈을 감은 여자의 숨은 불규칙적으로 가팠고 숨과 숨 사이에 비명이 칼날처럼 찢어졌습니다. 어디선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두어 번 날카롭게 들렸습니다. 남자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습니다.


남자는 네 가랑이의 호흡을 끊기보다, 그 사이에 자신의 숨을 밀어 넣고 싶었습니다. 여자는 나사를 조이듯 두 가랑이로 거구의 엉덩이를 감쌌고, 거구는 나사를 박아 넣듯 급하게 망치질을 해댔습니다.


남자는 드라이버를 들고 그림자처럼 다가갔습니다. 순간 거칠게 망치질하던 남자의 등에 꽂힌 드라이버는 여자의 가랑이에서 힘을 빼내고, 조임 나사를 풀게 했습니다. 거구의 눈이 풀렸습니다.


남자는 재빨리 거구의 호흡을 이어 자신의 나사를 그녀에게 꽂았습니다. 다시 가랑이가 네 개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다소 가벼워진 몸을 느꼈습니다. 여자의 파열음은 더욱 격해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몸 어딘가가 조용히 풀리고 있음을 느꼈을 뿐입니다. 어딘가 눅진한 기운이 남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오래 느끼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처용이 노래한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노래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새 내린 서리에서 땅 냄새가 은밀하게 배어드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사진은 '뉴시스'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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